“병원에서 직업 물어야 업무상 질병 보상 길 열린다”
의료기관 진료 때 직업정보 확인 필요성 제기
질병과 일터 연관성 몰라 신청 못 하는 노동자 많아
업무상 질병 신청 늘었지만 처리 절차는 여전히 더뎌
노동계 “긴 심사 기간 생계 공백 막을 선보장 필요”

병원이 노동자에게 직업을 묻고, 이를 업무상 질병 보상으로 연결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노동건강정책포럼은 2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선민·김윤·이용우 국회의원실과 '업무상 질병 인지 및 보상 활성화'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노동자가 자신의 병을 업무상 질병으로 알지 못해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신청하지 못하거나, 신청 뒤에도 긴 처리 기간 탓에 보상에서 멀어지는 문제를 짚고 대안을 찾는 자리였다.
첫 발제를 맡은 백도명 녹색병원 의사(서울대 명예교수)는 의료기관이 환자 직업을 제대로 묻지 않는 현실을 지적했다. 직업병을 찾으려면 병명만 볼 것이 아니라, 환자가 어떤 일을 해왔고 어떤 환경에 노출됐는지 함께 확인해야 한다는 취지다.
백 교수는 "직업병을 진단하려면 병만 볼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며 "병원에서도, 각종 조사에서도 직업을 묻는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과거 국민건강영양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아픈 사람 10명 가운데 2명 정도는 자신의 질병이 일과 관련 있다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렇게 확인한 직업 정보를 진료와 보상 절차로 이어주는 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백 교수는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 직업 정보를 직접 입력하고, 의사나 간호사가 이를 확인한 뒤 전자의무기록(EMR)과 연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직업 정보가 전자의무기록에 올라가고 인공지능으로 분류되면, 병원 진료와 정책에 함께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조승규 노무사사무소 씨앗 대표노무사는 업무상 질병 신청 증가 속도에 비해 제도 개선은 더디다고 짚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업무상 질병 신청은 크게 늘었지만 처리 절차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며 "신청 증가 폭에 맞는 대담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토론자들은 처리 속도를 높이되, 졸속 심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 공동소장은 병원에서 직업력을 먼저 확인해야 노동자가 업무상 질병 가능성을 알 수 있다고 봤다. 정 소장은 "신속한 처리가 중요하지만 공정성을 해칠 정도여서는 안 된다"며 "근로복지공단 지사 단계에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기준과 절차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긴 심사 기간에 노동자가 생계 불안을 떠안는 문제를 핵심으로 봤다. 업무상 질병 보상 신청 뒤 90일, 180일이 지나도록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노동자는 치료비와 생활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최종 판단 전이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치료와 생계를 먼저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며 "나중에 불승인됐다는 이유로 이미 지급한 돈을 돌려받는 방식은 노동자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쪽은 처리 기간 단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동우 고용노동부 산업보건보상정책관은 직업 정보가 노동자 건강과 일터 복귀에 중요한 자료라며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 협업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고 정책관은 "직업 정보는 건강과 사회 복귀를 판단하는 중요한 자료"라며 "두 부처가 함께 논의할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의료기관이 직업을 묻는 일부터 업무상 질병 보상까지 이어지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질병과 일터 사이 관련성을 노동자 개인이 홀로 입증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의료기관과 근로복지공단,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가 정보를 연결하고 책임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정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