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미담] “아트페어, 미술장터 넘어 문화 플랫폼으로 진화 중”
아트부산, 110개 부스 전체 기획전 구성
작품 사이로 관객 함께 걷는 등 이색 경험
하이브 아트페어 ‘부스비 0원’ 파격 조건
48개 갤러리 158명 작가 중복 없이 참여
국내외서 매달 대형 페어 개막 포화상태
亞 디렉터들 “관계의 장 돼야” 한목소리
매출 데이터 집착 말고 문화적 경험 제공
지역 맥락·작가 성장 가능성도 보여줘야

21일 오후 2시 아트부산의 VIP오픈이 시작됐다. 영국 작가 줄리언 오피의 최신작 ‘어린이 시리즈’로 개인전을 마련한 국제 갤러리 부스로 컬렉터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걷는 사람 모양의 작품 사이로 관객들이 함께 걷고, 부조 형태의 평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미국계 갤러리 글래드스톤은 우고 론디노네의 무지개색 ‘선(SUN) 시리즈’ 3점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회화의 맛’을 보여주는 알렉스 카츠, 살보의 작품 앞에서 감상을 나누는 관객이 많았다. 베이징·홍콩·싱가포르 등에 거점을 둔 탕컨템포러리는 중국 현대미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레고 블록 자화상을 처음 선보였고, 파리장식미술관 등 미술관이 소장한 작가 링 팡루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들과 마주한 지갤러리 부스는 우한나·최수진·최윤희·황수연 등 한국의 젊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으로 경쟁력을 더했다.


입구 걸개 작업을 선보인 작가 무나씨의 개인전 부스를 연 에브리데이몬데이. 폭 8m의 병풍부터 200호 크기의 대작 등 ‘미술관급 대형 작품’으로만 출품했지만 첫날부터 ‘솔드 아웃’됐고, 구매 대기자 명단이 예비 컬렉터들의 이름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팔릴 것을 기대하지 않은” 서용선 작가의 거친 목조각 설치 작업들도 판매로 이어졌다. 리안갤러리는 데이미언 허스트, 앤디 워홀, 짐 다인 등의 작품으로 하이엔드 컬렉터의 방을 꾸몄고, 피에스(PS)센터는 구본창·박유아를 비롯해 장혜경·권지영·연진영 등의 작업과 함께 ‘힙’한 티룸을 만들었다.

이번 아트부산 최고가 출품작으로 가나아트갤러리 부스에 전시된 나라 요시토모의 2000년작 ‘Pale Mounting Dog’는 경매에서 850만 달러 안팎에 거래되는 시리즈. 약 130억원으로 추산된다. 가나아트는 김창열,이우환,최종태 등의 작품으로 한국미술의 힘을 보여줬다. 갤러리OKNP는 일본 츠타야서점과 협력 부스를 만들어 마치 책방에서 책을 고르듯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서 미술작품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아트부산이 15주년을 맞은 올해부터 총괄기획을 맡은 정선주 이사는 “작품을 빽빽하게 나열하는 판매 위주의 부스를 지양하고, 부스 전체를 하나의 완성도 있는 기획전으로 구성해줄 것을 갤러리들에 제안했다”고 말했다. 관객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놓은 이 같은 혁신이 관람 만족 뿐만 아니라 판매에서도 성공을 이끄는 중이다.

같은 날 서울 강서구 코엑스마곡에서는 ‘하이브 아트페어’가 막을 올렸다. 기존의 판을 뒤흔들겠다는 포부로, 참가 갤러리로부터 부스비를 받지 않는 파격 조건으로 시작한 신생 아트페어다. 사각 큐브형 부스가 아닌 사다리꼴 부스들이 등을 맞댄 육각형 벌집 구조도 새로운 시도다. 주최 측은 부스비를 절감한 만큼 전시 기획에 더 공을 들여달라는 당부를 갤러리들에 전했다. 그 결과 48개 갤러리의 총 158명 참여 작가 중 중복된 작가가 단 한명도 없다.

비엔날레보다 아트페어의 영향력이 더 강력해진 요즘, 두 페어가 공교롭게도 같은 날 열리게 됐다는 사실보다 ‘아트페어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과 그로 인한 경기 침체가 미술 시장을 짓누르는 상황에서 얼핏 아트페어의 생존 모색처럼 보이지만 그 수면 아래에는 전 세계 아트페어 생태계의 지각변동이 맞물려 있다.
갤러리와 컬렉터들의 연간 계획은 아트페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1월 아트SG로 시작해 2월에는 프리즈LA, 3월 중순에는 네덜란드에서 테파프(TEFAF), 하순에는 아트바젤 홍콩이 열린다. 5월에는 프리즈 뉴욕과 테파프 뉴욕이, 6월에는 스위스 아트바젤 바젤이 개막해 미술 시장의 정점을 찍는다. 9월에는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함께 열리고 10월 프리즈 런던, 아트바젤 파리로 이어지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11월 상하이 아트위크 동안 웨스트번드 아트&디자인이 열리고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비치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한다. 대형 갤러리의 경우 이 같은 굵직한 아트페어만 참가한다 하더라도 월평균 1개 이상이다.
아트페어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아시아의 주요 아트페어로 부상하고 있던 ‘타이베이 아트 당다이’가 올해 전격 취소를 결정했다. 주최 측은 “전략적 재평가의 필요성”을 이유로 내세웠다. 가고시안·하우저앤워스·데이비드즈워너 등 세계 미술 시장을 좌우하는 ‘메가 갤러리’들이 불참하며 페어의 무게감이 떨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3월 아트바젤 홍콩, 5월 타이베이 당다이, 7월 도쿄 겐다이, 9월 프리즈 서울로 이어지는 아시아 순회 일정에 갤러리도, 컬렉터도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는 것 또한 이유로 지목됐다.
국내에서는 2018년을 기점으로 아트페어에 대한 일반 관람객들의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미술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2022년 프리즈 서울의 시작과 함께 아트페어는 문화 향유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발간하는 미술 시장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는 연간 108개(2024년 개최 기준)에 달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아트페어가 이제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지난달 아시아 주요 아트페어의 디렉터 8명을 초청해 한국 미술계를 돌아보고 아시아 아트페어의 현안을 함께 진단했다. 아트바젤 홍콩의 클로디아 찬, 도쿄 겐다이의 에리 다카네, 프리즈 아부다비의 알아누드 압둘라흐만 알함마디, 아트 타이베이의 비올라 야오, 홍콩 아트센트럴의 코리 앤드루 바, 아시나우의 디렉터 알렉산드라 팽 등을 만나 함께 다니며 대화했다. 이들 공통된 의견은 아트페어가 단순한 상업 플랫폼을 넘어 ‘문화적 플랫폼’이자 ‘관계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아트부산과 하이브 아트페어의 지향점과도 일치했다. 얼마짜리 작품이 얼마나 팔렸는지에 대한 단기적 매출 데이터에 집착하지 말고 레지던시 초청, 커미션 프로젝트 등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트부산처럼 지역 공동체와 현지 미술 생태계의 기반을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하이브 아트페어처럼 대안적·실험적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디렉터들의 공통된 목소리였다. 아시아 지역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강력한 무기인데 이 경우 단일한 기준으로 접근하지 말고 음식·전통·인프라 등 각 국가와 도시가 지닌 미세한 문화적 맥락을 파고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수령 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예술본부장은 “한국 아트페어는 이제 단순한 작품 판매의 장을 넘어 한국 미술의 맥락과 작가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면서 “프리즈 서울 이후 국제 무대에서 서울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졌지만 그 관심을 연중 전시·연구·비평·거래·교육으로 이어가는 구조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만큼 후속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특히 블루칩에 집중된 수요를 넘어 신진 및 중견 작가의 서사와 가치가 축적되고, 가격에 대한 신뢰가 함께 형성되는 유통 생태계가 중요하다”며 “정보, 네트워크, 해외 진출 기반을 통해 시장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프리즈 서울이 키아프 서울과의 협력을 약속하며 공동 개최를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다. 양측은 5년 계약 이후에도 함께할 것을 약속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개최지인 서울 강남구 코엑스가 내년부터 대규모 리노베이션 공사에 돌입하면서 대형 전시장 대관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프리즈 측은 서울에 남겠다는 의사가 확고하다. 프리즈 측은 “서울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 도시에서 프리즈의 장기적인 미래를 지속적으로 구축해 나가고자 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확인시키듯 프리즈는 중구 장충동에 마련한 상설 전시 공간 ‘프리즈하우스서울’에서 28일부터 7월 하순까지 국내 갤러리 15곳이 순차적으로 참여하는 릴레이 기획전을 연다. “한국 미술 생태계의 창의적 에너지를 반영하는 실험적인 형식의 전시들로 구성했다”는 앤디 세인트 루이스 프리즈하우스서울 디렉터의 말은 지역성과 한목소리를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한국은 더 이상 글로벌 미술계의 변방이 아니다. 팬데믹 이후 미술 시장의 세대교체 속에 아시아 미술 시장의 저력이 중요해졌고 그 중심에 서울, 한국이 있다. 미술 시장의 유행과 상업적 성공이라는 단기적 지표에 흔들리지 않고 각 도시와 지역이 지닌 고유한 문화적 맥락을 발굴하며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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