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기 맞은 ‘글로벌 감염병 영웅’ 이종욱 박사를 기리고 예우하는 방법

채인택 2026. 5. 22.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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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헬스]
2003년 WHO 사무총장…한국인 첫 국제기구장
의왕 라자로 마을과 남태평양에서 한센병 봉사
전 세계 소아마비·결핵·에이즈 감염병과 전쟁
WHO, 그가 만든 상황실에 ‘JW Lee’ 붙여 기려
서울대의대 개도국 의료연수 사업 ‘이종욱-서울’
그의 이름 붙은 감염병 병원과 백신단지 세웠으면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보건기구(WHO) 집행이사회 회의실에서 5월 20일(현지시간) 이종욱 박사 서거 20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5월 22일로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재직 중 쓰러져 순직한 한국인 의사 고(故) 이종욱 박사(1945~2006)의 20주기를 맞았다. 2003년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에 선임돼 제3세계 백신 접종 확대, 감염병 위기 상황 대비, 담배 규제 등 큰 일을 한 인물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어떻게든 그를 더욱 기리고 기억하며 예우하는 방법을 찾고 싶어진다. 그만큼 생전의 헌신과 업적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처음으로 국가원수가 이 사무총장을 기린 것은 고무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0주기를 이틀 앞둔 20일 X(옛 트위터)에 "제네바 세계보건총회 기간 중 서거 20주년 추도식이 열린다"고 알렸다. 이 대통령은 이 사무총장이 경기도 의왕의 라자로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것으로 보건의료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의 헌신을 기렸다.

WHO 총회에서 20주기 추모식

이 사무총장을 기리는 20주기 추모식은 현지시간 20일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한국 보건복지부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 주관, 6개국 보건부 공동 주최로 진행됐다. 추모식은 5월 18~23일 '글로벌 보건의 재편과 공동의 책임'을 주제로 현지에서 열리는 제79차 세계보건총회(WHA) 기간 중에 열렸다. WHO 팬데믹 협정 합의와 비준, 그리고 지속 가능한 보건 재원 확보 방안 등 굵직한 주제를 논의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고인이 평생 달성하고자 한 보건 형평성 실현을 위해 한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이 박사가 이룬 성취는 아직도 전 세계 보건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치하했다.

헌신적인 삶…의왕·피지·사모아·미크로네시아에서 한센병 환자 보살펴

WHO 사무총장으로 활동할 당시 이종욱 박사. 사진=WHO 홈페이지(퍼블릭 도메인)

이 사무총장을 이렇게 추모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국제기구 수장을 맡았기 때문도, 현직에 있으면서 안타깝게 과로로 세상을 떠나서만도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의사로서, 보건행정가로서 현장에서 아프고 힘든 사람과 온몸으로 함께하는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다.

경복고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그는 뒤늦게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 서른이 넘은 1976년 졸업했다. 의대 재학 중 경기도 안양(지금은 의왕)의 라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봉사를 했다. 이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봉사 활동을 온 카부라키 레이코(鏑木玲子) 여사와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대학 졸업 뒤 부인과 함께 남태평양 피지섬으로 가서 봉사 활동을 이어갔으며, 감염병을 연구해 1981년 미국 하와이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를 받았다.

1981년 9월부터 1983년 3월까지 미국령 사모아섬의 아열대 질병 센터에서 보건 담당관으로 근무한 뒤 1983년 6월 WHO에 들어가 1987년 12월까지 미크로네시아에서 한센병 자문관으로 현장을 지켰다.

WHO에서 소아마비와 전쟁 벌이며 발생률 낮춘 '백신의 황제'

1987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소(WPRO)에 들어가 1990년 6월까지 만성질환 지역 컨설턴트를 맡았으며 1990년 6월부터 1994년 5월까지 질병 예방 및 통제 국장으로 일했다. WPRO는 WHO를 구성하는 6개 지역의 하나로 한국·일본·필리핀·호주·뉴질랜드·피지·베트남 등이 포함된다. 북한은 인도·방글라데시·태국 등과 함께 동남아시아지역사무소(SEAR)에 포함된다. WHO의 지역 사무소는 전염병 대응, 기후변화 보건 영향 대응, 보건 의료 시스템 강화 및 지역 국가들에 대한 맞춤형 보건의료기술 지원 등을 담당한다.

이 사무총장은 1994년 5월 마닐라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개발도상국의 백신 접근성을 높일 목적으로 1990년 제네바에 설립된 국제기구인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의 아동 백신 예방접종 총괄 책임자를 맡아 1998년 7월까지 일했다. WHO와 GAVI는 서로 긴밀한 상호보완적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관계다. WHO가 백신을 승인하고 보건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면, GAVI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백신을 구매해 전 세계에 보급한다.

이 사무총장은 GAVI에서 일할 당시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 세계에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그 결과 1년 뒤 소아마비 발생률을 세계 인구 1만 명 당 1명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그를 '백신의 황제'로 부르는 이유다.

GAVI는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소아바비 백신을 포함해 7억6000만 명이 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예방접종 사업을 지원했다. 그 결과 1300만 명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WHO 결핵퇴치국장으로 글로벌 민관협력…사무총장 되자 에이즈 퇴치사업

20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고 이종욱 박사 서거 20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고 있는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

그 뒤 1998년 7월부터 1999년 10월까지 노르웨이 총리 출신의 WHO 사무총장 그로 할렘 브룬틀란의 수석 정책고문을 거쳐 1999년 10월~2000년 10월 특보를 지냈다. 그 뒤 2000년 12월 WHO 결핵퇴치 사업국장을 맡으면서 글로벌결핵퇴치파트너십(Global Partnership to Stop TB)과 글로벌약품조달기구(Global Drug Facility: GDF)의 설립을 주도했다. 현재까지 보건의료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관협력 사례로 평가받는다.

2003년 치열한 경쟁을 거쳐 WHO 제6대 사무총장에 뽑힌 그는 공식용어로 HIV(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AIDS(후천성 면역결핍증) 퇴치, 간단히 말해 에이즈 퇴치사업을 최우선 과제로 잡았다. 2005년까지 관련 환자 300만 명에게 치료제를 공급하자는 '3 by 5 캠페인'을 집중적으로 펼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인류를 위협하는 다양한 감염병에 대항한 공로로 200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올랐다. 이처럼 이 사무총장은 한센병, 소아마비, 결핵, 에이즈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위협한 감염병에 과학적으로, 효과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인류 보건의료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국제보건규칙 정비, 팬데믹 대응 체계 마련도

활발한 글로벌 백신 사업으로 개발도상국의 감염병 대응은 물론 미래 팬데믹에 대응할 제도적 초석인 국제보건규칙(IHR) 개정까지 이뤄냈다. 이는 인류가 코로나19 등에 대항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채택도 이끌었다.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 안타깝게도 뇌경색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제네바 현지에서 WHO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부인은 남미 페루에서 보건사업을 계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보건사업 상징인물 이름 딴 '이종욱 센터' 설립 제안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이종욱 박사의 부인 레이코 카부라키 여사(가운데),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20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 있는 '이종욱 전략상황실'의 재개관 기념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 사무총장은 한국의 글로벌 보건사업을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여러 방식으로 그를 기리며 추모하고 기억한다. 그의 모교인 서울대 의대가 2011년부터 9년 일정으로 진행한 의학교육 국제지원사업에 '이종욱-서울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인 것이 그 가운데 하나다. 개도국 의대 교수들을 데려와 최신 의료기술을 전수하는 사업이다. 이 연수 프로젝트는 1955~61년 미국이 진행했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서울대 의대가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받았던 경험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빛난다. 모두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낚시법을 가르치는 자립 프로그램이다.

WHO도 당연히 그를 기린다. 제네바의 WHO 본부에 있는 'JW Lee SHOC'라는 이름의 방이 대표적이다. 전 세계의 보건의료 정보를 24시간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대책을 강구하는 전략보건운영센터(SHOC)가 이 방에서 운영된다. WHO의 긴급대응센터이자 상황실이자, 질병 및 보건의료 위기와의 싸움을 진두지휘하는 '워룸(War Room)이다. WHO 운영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다. SHOC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SARS)이 한창 유행(2002~2004년)하던 2003년 취임한 이 사무총장이 설치했다. 이 방은 설치 직후 글로벌 사스 대응에 활용된 건 물론 이 사무총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인류가 감염병을 물리치는 '전략사령부'가 됐다. 신종플루(2009~2010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 2015년), 코로나19(2019~2022년), 에볼라(2014~2016년 서아프리카 대유행, 2018~2020년 콩고민주공화국 유행, 2026년 콩고민주공화국 등)까지 각종 전염병의 유행에 대응하는 현장이 됐다. 이 방에 'JW Lee SHOC'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이 사무총장은 2006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무궁화장 추서를 비롯해 수많은 명예가 이어졌다. 하지만 욕심을 하나 더 내고 싶다. 글로벌 감염병 대응과 백신 개발 및 접종사업을 주도하는 보건의료단지와 백신센터를 세우고 '이종욱 센터'로 이름 붙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한국에 세워도 좋지만 감염병 위기에 대한 신속 대응에 유리한 지역이나 신속한 백신 배송이 가능한 지역도 상관없다. 한 나라가, 공동체가 보건의료 영웅을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인류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전 세계인은 이종욱 박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

채인택 의학 저널리스트 (tzschaeit@kor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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