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많은 곳에 있어야 역사도 기억”… 광화문 ‘감사의 정원’ 가보니
이런 추모 공간을 광화문광장에 세운 것은 정말 잘한 일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역사라도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잊히기 쉽습니다. 광화문처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있어야 직장인이나 젊은 세대도 오가며 자연스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계속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1948년 어머니 등에 업혀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A씨(80)는 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6·25전쟁 참전국 기념 조형물 ‘감사의 빛 23’을 한참 바라봤다. 그는 몇 년 전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찾았을 때 방문객이 많지 않아 아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치권에서는 조형물 형태와 사업비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날 현장에서 만난 시민과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6·25전쟁은 당연히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반응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 한복판에 이런 공간을 둔 것 자체가 문제 될 일은 아니라는 취지였다.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선 23개 돌기둥… 관광객·학생들 발길
22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를 오가던 외국인 관광객들이 낯선 석재 조형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선 6.25m 높이의 돌기둥 23개였다. 관광객들은 조형물 주변을 천천히 돌며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묻던 이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22개국과 대한민국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듣고 “와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형물은 지난 12일 문을 연 6·25전쟁 참전국 기념 공간 ‘감사의 정원’의 지상 조형물이다. 광화문광장을 지나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6·25전쟁과 참전국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마주하도록 만든 공간이다.
이날 광장에는 현장 체험 학습을 나온 초·중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은 ‘감사의 빛 23’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조형물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광화문광장 한복판이 짧은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된 셈이다.

◇지하 전시 공간 ‘프리덤홀’ 열흘 만에 1만명 찾아
‘감사의 정원’은 지하 전시 공간인 ‘프리덤홀’로 이어진다. 전체 사업비 약 206억원 가운데 81%인 167억원이 프리덤홀 조성에 쓰였다. 지난 12일 개관 이후 하루 평균 1000여명, 열흘 만에 1만명 넘는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프리덤홀에 들어서자 왼쪽 벽면에 설치된 23개의 삼각 발광다이오드(LED) 기둥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참전국의 국화(國花)를 모티브로 한 ‘블룸 투게더’ 영상과 함께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관람하던 대학생 박모(23)씨는 “웅장해서 특히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맞은편 벽면에는 6·25전쟁 이후 한국의 발전상을 담은 영상이 상영됐다. 해외 참전 용사들의 인터뷰에 이어 국제사회 공헌 활동을 하는 이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전쟁 이후 도움을 받던 ‘수원국’에서 다른 나라를 돕는 ‘공여국’으로 바뀐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전시장 가운데에는 둥근 공 모양의 미디어 시설인 ‘연결의 창’이 설치돼 있었다. 관람객이 앞쪽 스크린에서 6·25전쟁 당시 사진을 선택하자, 연결의 창에 해당 사진이 떠올랐다. 흑백 사진은 인공지능(AI) 기술을 거쳐 움직이는 컬러 영상으로 바뀌었다.
안쪽에는 ‘감사의 아카이빙 월’도 마련돼 있었다. 키오스크 형태의 스크린을 누르면 국가별 6·25전쟁 참전 용사 소개와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관람객이 참전 용사에게 감사 메시지를 남기면 전시장 벽면에 바로 표시되는 체험 공간도 있었다.

◇정치권선 “혈세 낭비” 비판… 시민들은 “기억할 공간 필요”
감사의 정원이 공개된 뒤 정치권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비판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지상 조형물의 형태가 군사주의적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사업비가 과도하다는 주장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상 조형물인 ‘감사의 빛 23’을 두고 “외국 군대의 의장대 사열 자세를 본떠 ‘받들어 총’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하겠다는 것은 광장의 정체성을 군사주의적이고 외세 의존적으로 퇴색시키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점심시간대 광화문광장에서 ‘206억 혈세 낭비’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감사의 정원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체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 유학생 고모(20)씨는 “6·25전쟁은 우리나라의 기반이 흔들렸던 일이고, 당연히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며 “굳이 정치적 문제로 끌고 가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직장인 안모(35)씨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역사적 사건을 다시 기억할 만한 공간을 마련한 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광화문광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늘 찾는 곳인 만큼, 역사적 의미를 담은 공간이 있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여행 온 로버트 에커린(57)씨 부부는 역사적 사건을 논의해볼 수 있는 장이 생기는 것 자체가 의미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에커린씨는 “독일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과거사 문제를 두고 여전히 토론이 이어진다”며 “한국은 여전히 분단국가이고, 그런 측면에서 6·25전쟁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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