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전쟁 희생양’ 걸프국, 안보와 중동 질서 재편 나서나
이란과 불가침 체제 등 모색…UAE 독자노선 강화로 낙관 못 해

이란과 인접한 걸프 국가들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원유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자원과 호르무즈 해협 등 주요 해상 통로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이란의 타격 대상이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걸프 국가들은 이번 전쟁으로 새로운 방어 체계를 마련하고 역내 질서를 재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미국과의 거리, 걸프협력회의(GCC) 내 회원국 간의 관계 설정 등 복잡한 역내 안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다시 역내 분쟁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 에너지 시설 때리며 ‘레드라인’ 넘었다
걸프 국가들은 전쟁의 여파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인접한 이란의 영향력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시도가 여전히 걸프 국가들에 치명적일 수 있음을 다시 증명한 것이다. 특히 이번 전쟁에서 이란이 걸프 국가들의 군사 시설과 에너지 시설까지 타격하면서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랍에미리트(UAE)의 경우 지난 2월 28일 개전 이후 2800여발의 미사일 및 무인기(드론) 공격을 받았다. 이 같은 타격 횟수는 전쟁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받은 것보다 많은 수준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는 에너지 안보의 붕괴로 이어졌다. 전쟁 발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수출량은 기존 대비 약 3분의 1로 감소했고, UAE의 원유 수출량은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송유관이 없는 바레인, 쿠웨이트는 사실상 원유 수출길이 막힌 상태다.
이란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걸프 국가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관광 산업도 마비됐다. 세계관광여행협의회에 따르면 개전 이후 몇주 간 중동 지역 관광 산업은 하루 최소 6억달러(약 8824억원)의 손실을 봤다. 이에 따라 수만명의 서비스업 종사자가 일시 해고되는 등 극심한 경기 침체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도 걸프 국가들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교전 재개되면 걸프 국가 참전 위험 높아질까
미국이 이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경우, 이란은 걸프 국가에 더 강도 높은 보복을 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란이 걸프 국가들의 유전, 정유 시설, 항만 등 핵심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해 세계경제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는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5월 18일(현지시간) 전했다.
이란 정부의 비공식 안보 고문으로 알려진 메흐디 카라티안 정책부흥연구소장은 지난 4월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우리는 UAE를 낙타를 타고 다니던 시대로 되돌릴 것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알리 알포네 아랍걸프국가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은 “이러한 발언은 다소 과장됐을지라도 IRGC 지도부 내의 중요한 사고 흐름을 반영한다”며 “이란이 주요 산유국들에 보복할 가능성은 미국의 대이란 행동을 억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라고 NYT에서 말했다.
교전이 재개되고 이란이 주요 기반 시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한다면 그간 되도록 무력 충돌을 피해온 걸프 국가들이 전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 걸프 국가들의 군사적 맞대응에 관한 증거가 최근 드러난 바 있다. UAE는 지난 4월 초 이란 남부 라반섬의 정유 시설을 비밀리에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란 상공에서 UAE의 것으로 보이는 전투기가 포착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우디도 지난달 이란 본토를 여러 차례 비밀리 공습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쿠웨이트 외교부 또한 지난 5월 12일 성명을 통해 IRGC 대원 4명을 체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사우디와 UAE는 막강한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다. 사우디는 미국의 F-15, 유로파이터 타이푼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기 449대를 실전 운용 중이며 중국산 공격용 드론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UAE도 F-16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실전 훈련을 받은 공군 조종사들을 보유하고 있다. 빌랄 사브 채텀하우스 중동 및 북아프리카 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은 “만약 사우디와 UAE가 이란에 대한 보복 공격을 지시한다면 양국 공군은 이란 내 군사 시설과 에너지 시설을 타격한 뒤 자국 기지로 귀환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쟁 후 새로운 중동 질서…미국 중심 동맹 벗어날까

전쟁 이후 중동 내 안보 질서는 재정립 과정을 밟고 있다. 특히 사우디는 미국에 의존해왔던 기존 안보 체계를 벗어나 대안적인 체제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지난 5월 14일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사우디는 전쟁 이후 중동 국가들과 이란이 상호 공격을 자제하는 불가침 체제를 구축하는 방안을 동맹국들과 논의해왔다. 사우디 냉전 종식의 토대가 된 1975년 체결된 헬싱키 협정을 참고해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번 전쟁을 계기로 사우디는 이집트, 튀르키예, 파키스탄 등과 결집하려 하고 있다. 이들 4개국 외교장관들은 지난 3월 19일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긴급 회동을 갖고 전쟁 대응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프로젝트 프리덤’ 작전 시행을 발표한 후에도 사우디는 쿠웨이트와 함께 작전 지원을 위한 미군의 영공 및 군사기지 접근을 거부하기도 했다. 사우디의 이 같은 행보는 현실적 선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을 동맹으로 삼고 미군을 주둔시켜 안보를 보장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내 미군기지가 이란의 공습 표적이 되는 등 안보가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전 인도 국가안보위원회 자문위원 겸 외교 평론가 브라마 첼라니는 지난 5월 14일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 기고문에서 “무조건적인 안보 협력의 시대는 끝났다”며 “걸프 지역 국가들이 미국과의 동맹을 완전히 파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국 관계를 과거보다 제한적인 범위로 재정의하고 있다”고 짚었다.
다만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중동 질서 재편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사우디가 주요 파트너로 여겼던 UAE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탈퇴하는 등 사우디와 부딪히며 독자노선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UAE가 사우디와 카타르 등 인접 국가들을 설득해 이란의 미사일·로켓·드론 공격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공동으로 추진하려 했으나 이웃 국가들이 이를 거부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UAE는 사우디와 달리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마이크 허커비 주이스라엘 미국 대사는 지난 5월 12일 이스라엘이 UAE에 아이언돔 방공 체계와 운용 인력을 파견했다고 확인했다.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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