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간 가야를 함께 다스렸다”…삼국유사가 밝힌 ‘2000년전 한국-인도 공동정권’ 탄생기[이기환의 사래자]
‘사래자(思來者)’는 역사가 사마천이 언급한 ‘술왕사(述往事) 사래자(思來者)’에서 나온 말. ‘과거의 일을 서술하여(술왕사) 앞날을 생각한다(사래자)는 것으로 역사책을 쓰는 자세를 의미한다.

“파도가 두려워 항해를 포기했다면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 “더 많은 파사석탑을 쌓아가자.”
얼마전 인도를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양국 경제인들이 만난 자리에서 특별히 언급한 유물이 ‘파사석탑’이다. ‘파사석탑’(경남도 유형문화유산)은 경남 김해 구산동 수로왕비릉 경내에 놓여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곱씹어보자. “인도의 해양 문명은 2000년 전 한반도에도 와 닿았다. 고대 가야국 김수로왕과 인도 야유타국 허황옥(허황후)가 인연을 맺었다…허황옥의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이 파도를 잠재우고 길을 열어줬다…”
그러면서 이대통령은 “만약 파도가 두렵다고 항해를 포기했다면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한국·인도 간)교류의 영역을 확장하며 더 많은 ‘파사석탑’을 쌓아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모디 인도 총리가 이대통령에게 “허황옥 스토리를 한-인도 합작영화로 만들자”고 깜짝 제안했다는 언론보도도 이어졌다.
기원후 48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가져온 파사석탑은 본래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평형석 용도로 실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18~19세기 문인 이학규는 <삼국유사>를 인용, “허황후가 큰 배에 돌을 실어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했다”면서 ‘파사석탑’은 바람을 진정시키는 용도로 실은 ‘진풍탑’이라 규정했다.
파도신의 노여움
대체 파사석탑이 어떤 유물인가.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과 ‘가락국기’ 등을 토대로 알아보자. 기원후 48년 5월7일이었다. 서역의 아유타국왕이 딸(허황옥)을 불렀다. 아버지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어젯밤 꿈에 황천(皇天)이 나타나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낸 왕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다. 경들은 공주를 시집보내라’고 말씀하셨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16살 공주는 수행원인 신보와 조광 부부를 비롯해 시종 20여 명을 이끌고 가락국행 배를 탔다. 배에는 금수능라(錦繡綾羅·수놓은 비단)·의상필단(衣裳疋緞·비단 옷)·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를 잔뜩 실었다. 부모가 마련해준 딸의 혼수품이었다.
그러나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배가 한 치 앞도 나아가지 않았다. 공주가 돌아오자 국왕은 “풍랑을 가라앉히려면 이 ‘파사석탑’을 배 안에 실으라”고 명했다. 그러자 배가 순항할 수 있었다.(‘금관성 파사석탑’)

‘무례하다. 신랑이 나와라.’
두 달 여의 항해 끝에 공주를 태운 배가 가락국 금관(김해) 앞바다에 닿았다.(7월27일)(‘가락국기’) 마침 가락국 수로왕은 구간(九干·토착 세력인 아홉 부족의 수장)이 권하는 혼인처를 거절하고 ‘하늘이 점지해준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유타 국왕의 꿈에 나타난 ‘황천’, 즉 하늘신이 가락국 김수로왕이 탄생할 때도 현현한 것이다. 수로왕은 공주가 도착하자 구간을 보내 맞이했다. 그러나 공주는 당찼다. “누군지 알고 그대들을 따라가겠느냐”고 호통 쳤다.
그것은 “신랑이 직접 와서 신부를 맞이하라”는 당당한 요구였다. 한방 먹은 수로왕이 직접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는 그제서야 수로왕의 손을 잡았다. 수로왕 부부는 임시 궁궐을 마련해서 2박3일의 신혼여행을 즐긴 뒤 대궐로 돌아왔다.(8월1일) <삼국유사>는 “이후 수로왕-허황후 부부는 150여년 간이나 함께(同御) 가락국을 다스렸다”면서 “그러다가 기원후 188년 허황후가 157세의 춘추로 죽었다(붕·崩)”고 전했다.
<삼국유사>는 “남편 수로왕도 부인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기원후 199년 158세에 죽었다…”(‘가락국기’)도 전했다. 가락국은 김수로왕·허황후 부부가 낳은 거등왕(재위 199~253)부터 구형왕(?~532 혹은 562)까지 10대에 걸쳐 490년(혹은 520년)동안 이어진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가장 논란을 일으키는 대목은 바로 이재명 대통령도 콕 찍어 언급한 ‘파사석탑’ 문제이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에 따르면 분명히 공주(허황옥)가 기원후 48년 가락국에 올 때 배편에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
그렇다면 그때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건가. 하지만 불교는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후 1세기 중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동남아시아 푸난(扶南·메콩강 하류에 존재한 고대 국가)에 건너온 것도 기원후 3세기로 알려졌다. 그런 불교가 중국-동남아를 훌쩍 뛰어넘어 한반도 남부까지 전해졌다? 그것도 기원후 1세기 중반에?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봇물을 이뤘다.

발품을 판 일연 스님
그런데 여기서 달리 봐야할 것이 있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을 절대 허투루 보면 안된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어영부영 쓰지 않았다. <삼국사기>(142종)보다 훨씬 많은 문헌(185종)을 인용했다. 그 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엔 현장을 직접 답사했다. 궁중에서 역사적 사실 만을 토대로 편찬한 정사(<삼국사기>)와는 또 다른 <삼국유사>의 맛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조선의 생활과 문화의 원두(元頭)이자 고형(古形)은 이 책(<삼국유사>) 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 역시 일연의 장점이 도드라지는 기사라 할 수 있다.
우선 ‘가락국기’는 <삼국사기>조차 언급하지 않은 유일한 가야사 관련 문헌 사료이다. 일연은 ‘가락국기’의 서두에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대의 대강(요 도종의 연호·1075~1085) 연간에 금관지주사 문인(文人·이름은 미상)이 편찬한 <가락국 본기>를 요약한 것”이라 설명했다. 일연은 ‘허황된 자료를 참고하지 않았노라. 족보가 있는 사서를 정리했노’라고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

‘금관국 파사석탑’조는 어떠한가. 일연은 ‘파사석탑을 가야국행 선박’에 실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런 뒤 ‘가야의 불교 도입 시기’와 관련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한다. “수로왕이 부인을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 때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불상과 불교의 교법)가 아직 들어오지 못해 토착민이 믿지 않았기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8대 질지왕 2년(452)이 되어서야 가야 땅에 절을 세웠다. 왕후사를 창건하여 복을 빌었고….” 일연 스님의 해설을 정리해보자. 물론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가져오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가야땅에서는 불교가 널리 보급될만큼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마디로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가져온 ‘기원후 48년=가야의 불교 도입 시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찰이 건립된 ‘가야의 불교 도입시기=452년’으로 단정할 수 없다. 따져보자. 기록상 나타난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불교 도입 시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고,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했다는 372~375년으로 특정된다. 백제는 호승 마라난타가 진에서 온 침류왕 즉위년인 384년이고, 신라는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들어와 모례의 집에 머문 눌지왕 연간(417~458) 등으로 보인다. 가야는 어떤가. 사찰을 세운 452년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는 물론 가야도 정식 도입 시기를 특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간에 불교가 소개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일 수 있다. 파사석탑은 허황옥의 혼수품이 아니었다. <삼국유사>는 파도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뒤늦게 실은 물품이었다. 그래서 배가 뒤집히지 않게 넣은 평형석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가야사람들이 혹은 그 후대에 그 석재를 가공하여 석탑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짙다.
한반도에는 없는 돌
또하나 착안점이 있다. 일연이 <삼국유사> ‘파사석탑’조를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했다는 것이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일연이 김해 답사길에 나서 파사서탑을 눈 앞에서 보고 만지면서 허황옥을 기리는 시까지 읊었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에게 빌어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1000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 일연의 답사기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남겼다. 우선 일연은 파사석탑의 재질이 ‘한반도산’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일연은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에게 빌어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1000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는 시를 읊었다.
2019년이었다. ‘가야본성 특별전’ 전시를 위해 파사석탑을 옮겨온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대 산학협력단에 이 탑이 산지와 특성을 분석 의뢰했다. 그 결과 흥미로운 분석자료가 나왔다. 즉 대자율(암석이 지니는 자성), X-선 형광, 적외선 분광 등으로 들여다보니 탑의 재질은 상당량의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이라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엽랍석은 주로 고온성 산성 열수(약 200~300도)로 생성된 2차 변질 광물이다. 또 이 석재에 붉은 빛이 감돈 이유는 마그마 활동이 남긴 산화철 광물(적철석)이 불규칙하게 포함되어 있어 얼룩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분석팀은 “이러한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은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라는 잠정결론을 내렸다. 일연이 ‘한반도산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던 것이 750년 후 첨단과학으로 증명된 것이다.

그래도 꺼림칙한 부분이 남아있다. 지금 파사석탑은 돌만 쌓아놓은 형태로 남아있다. 탑인지 아닌지도 헷갈린다. 하지만 부재 돌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탑의 형태였던 것은 맞다. 부재 아랫부분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출목(서까래를 바치려고 기둥열 밖으로 빠져나온 나무)의 흔적이 역력하다. 탑을 조성하면서 조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일연은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일연이 보기에도 일반적인 불탑의 형태와 뭔가 달랐다는 뜻으로 읽힌다. 즉 사면이 방형이라면 바둑판 같은 형태이다. 일연은 일반적인 탑의 형태(예컨대 석가탑 같은)가 아닌 바둑판 형태의 돌을 쌓은 탑을 보고 ‘기이한 4면의 5층탑’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금관성 파사석탑’조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즉 파사석탑이 허황옥이 배에 실은 호화혼수품 목록에서는 빠져있다는 것이다. ‘가락국기’에 실린 혼수품에는 ‘금수능라’와 ‘의상필단’, ‘금은주옥’, ‘구슬 장신구’ 등만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 파사석탑은 혼수품이 아니었다. ‘파도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나중에 실은 물품’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19세기초 이학규(1770~1835)는 파사석탑의 용도와 관련, 의미심장한 오언절구를 남긴다. “가락국 보주태후 허황후가 서역에서 처음 올 때 큰 배에 돌을 실어 뒤집어지지 않게 했다.”(<낙하생집>) 그렇다. 허황옥이 배에 실은 것은 탑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저 배가 뒤집혀지지 않게 바닥에 깔아넣는 평형석이었을 수 있다. 이 평형석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훗날 가야 백성들이 불교를 믿게 되면서 불탑으로 조각되었을 수 있다.
물론 이 파사석탑이 처음엔 ‘탑’이 아니었다 해도 그 의미가 폄훼될 필요는 없다. 이 탑은 일연의 시처럼 처음에는 이역만리 신랑을 만나러 오던 허황옥의 안전을 지켜주었고, 나중엔 왜의 침략을 막아내니 기도처로 그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아유타국인가 남천축국인가
허황후와 김수로왕의 혼인이야기가 담긴 파사석탑과 가락국 이야기는 이후 일관되게 전해졌다.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인 허목(1595~1682)은 ‘가락국 보주 허 태후 묘지음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태후의 성은 허씨다. 족보에는 아유타국 군주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금관국의 고사에는 남천축국 군주의 딸이라 했다. 또 태후 자신이 서역의 허국 군주의 딸이라 했다…호를 보주태후 혹은 황옥부인이라 했다.”(<기언> ‘제41권 서씨선묘의 비문과 석지’) <연려실기술> ‘역대전고·신라의 속국’조는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왔는데…혹은 남천축국의 왕녀인데…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한다”고 전했다.

대중잡지인 <별건곤> 1934년 1월1일자 기사(‘4000년사 외사-역대 왕비·공주편’)도 흥미롭다. 언론인 차상찬(1887~1946)이 쓴 기사는 “몇 천 년 전 조선 남자와 외국 여인이 결혼한 드물고 현저한 예가 바로 가락국 김수로왕과 왕후 보희태후”라 소개했다. 이어 “왕후는 인도의 아유타국 왕녀(혹은 남천축국 왕녀)로 풍랑에 표박하여 조선에 온 분”이라 했다. 차상찬은 “무슨 동기로 고국을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풍랑에 밀리고 밀려서 온다는 것이 우연이 가락국 앞바다에 왔다”고 했다.
이 기사는 특이하게도 허황옥이 풍랑에 떠밀려 가락국까지 왔다고 했다. 어찌되었든 고려시대 일연 스님부터 일제강점기 차상찬까지 일관된 서술이 있다. 허황옥의 고향이 서역 혹은 인도 아유타국이거나 남천축국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허황옥을 따라온 2명의 이름이 신보(申輔)·조광(趙匡)이라 했다. 중국 이름이다. 허황후가 중국과 관련있는 집단의 일원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학계에서는 허황후의 고향을 두고 설왕설래 하고 있다. 이 중 아유타국은 인도 갠지스 강의 상류인 사라유 강변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인 아요디아 왕국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물론 남천축국(남부 인도)도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 그랬으니 허황옥의 고향은 크게 봐서 현재의 인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갖가지 설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인도공주 허황옥의 중국(보주) 경유설’이다. 즉 기원전 70년 무렵 대월지(인도유럽계 유목민)가 갠지즈강 하류를 점령하자 아요디야(아유타국)에 살던 허황옥의 조상들이 고향을 떠나 중국 사천성 보주에 정착했다. 이들은 허(許·사제라는 뜻)씨 성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 중 일파가 양자강~상해를 거쳐 기원후 48년 해류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 집단 소속인 허황옥이 가락국 왕후가 되었고…. 허왕후릉 비문이나 각종 문헌자료에서 보이는 ‘보주태후’ 시호가 허황옥의 중국 고향인 사천성 보주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다.
허황된 얘기 같지만 허투루 들를 얘기는 아니다. 고고학자인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가 보주 안악 서운향의 허씨 종산을 답사하던 중 우물가 큰 바위에 새겨진 신정기를 발견했다. 그 내용 중에 ‘허녀황옥(許女黃玉)’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한 초에 허황옥이라는 소녀가 있어 용모가 수려하고 지략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수로왕과 허황옥이 함께 다스린 150년
만약 이 신정기 혹 ‘허녀 황옥’이 김수로왕과 혼인한 허황옥, 그 분이라면 어떤가. 돌이켜 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허황옥을 따라온 2명의 이름이 신보(申輔)·조광(趙匡)이라 했다. 중국 이름이다. 그러니 각종 문헌사료에 등장하는 ‘보주태후’는 다름아닌 인도 아유타국-중국-사천성 보주를 거쳐 가락국으로 이주한 허황옥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 또한 그럴 듯한 가설일뿐이다. 다만 기원후 1세기 무렵이라면 가야가 낙동강~남해로 이어지는 해양 수송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을 벌이던 때였다. 단적인 예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는 “변진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마한과 예, 왜는 물론이고 2군(낙랑·대방군)에도 공급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니 허황옥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 해상세력이 가락국 임금과 이른바 결혼 동맹을 맺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에서 유독 눈에 밟히는 구절이 있다. 즉 “수로왕이 허황옥을 아내로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同御)이 150여 년이었다”(‘파사석탑’)고 기록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은 김수로왕보다 10여 년 연상이었다.
게다가 가락국에 도착한 허황옥은 ‘김수로왕이 직접 영접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호되게 나무랐다. 당찬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기록대로라면 어떤가. 가야는 김수로왕(토착민)과 허황후(해양세력)가 150년 이상 공동정부를 구성했다는 뜻이 된다. 한국-인도 간의 관계가 볼수록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참고자료>
김병모, <허황옥 루트-인도에서 가야까지>, 역사의 아침, 2008
전지혜, ‘김해 파사석탑의 원형에 대한 고찰’, <진단학보> 133호, 진단학회, 2019
고려대산학협력단, ‘경남문화재자료 제227호 김해 파사석탑의 암석학적 특성분석 및 산지추정 분석 결과 보고서’, 국립중앙박물관, 2019
이거룡, ‘파사석탑 고찰-가락국과 아유타국의 해양문화교류 가능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불교문화> 제34권,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
황정일, ‘가야 불교 전래 관련 쟁점 검토’, <동아시아불교문화> 제25권,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5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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