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산 텃밭' 동남아에 눈독 들이는 일본…경쟁은 시작됐다 [더 라이프이스트-이성득의 아세안 돋보기]

지난 5일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필리핀 대통령궁을 찾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 뒤에는 묵직한 의제가 있었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30년 넘게 운용하다가 퇴역시킬 아부쿠마급 호위함 최대 6척을 필리핀에 이전하는 방안을 놓고 실무 협의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중고 군함 거래가 아니다. 일본이 전후 평화헌법 아래 유지해온 '무기 수출 억제' 원칙을 단계적으로 허물어온 끝에, 이제 살상 무기 수출까지 본격화하는 전환점에 섰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달 21일 수십 년 만에 최대 규모의 방산(방위산업) 수출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 기존에는 구조·수송·경보·감시·소해 장비에 한정됐던 수출 허용 범위가 군함·미사일 등 살상 무기 전반으로 확대됐고, 수출 허가 방식도 품목별 원칙에서 건별 심사로 전환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외부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의 무기 공급 여력이 한계에 달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동맹국들에 안보 분담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 활동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내 요인도 더해진다. 일본 정부는 2026회계연도 방위비를 처음으로 9조엔 이상 규모까지 끌어올리며 방산 산업화를 국가 성장 전략의 한 축으로 명시했다. 일본 입장에서 방산 수출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지정학적 생존 전략이자 경제 전략이 됐다.
동남아는 지금 군비 확충의 한가운데에 있다. 필리핀은 약 350억달러 규모의 군 현대화 계획을 승인했고, 인도네시아는 2026년 국방 예산을 대폭 늘렸다. 남중국해 긴장, 노후 러시아제 장비 교체 수요, 재난 대응 역량 강화까지 맞물리며 역내 방산 수요는 당분간 구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고이즈미 방위상은 필리핀에 이어 인도네시아를 찾아 방산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필리핀 길베르토 테오도로 주니어 인도네시아 국방부 장관은 일본의 규제 완화가 “최고 수준의 방산 장비 접근을 가능하게 해 지역 억지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환영했다. 호주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모가미급 호위함 사업에서 우선 3척 계약을 체결했고, 전체 사업은 최대 11척 규모로 확대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일본은 이를 동남아 공략의 모델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아부쿠마급 호위함에 지대공 유도탄·훈련기까지 연계한 패키지형 협력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동남아 전체가 일본과의 방산 거래를 반기는 것은 아니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당사자인 필리핀이 가장 적극적이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과 방산 협정을 맺으면서도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42대, 이탈리아제 군함, 한국과 공동 개발 중인 KF-21 보라매 전투기, 프랑스 나발 그룹과의 스코르펜급 잠수함 건조까지 공급선을 의도적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중국을 의식하면서 어느 한 나라에 방산 의존도가 쏠리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중립을 지켜온 동남아 외교의 관성이 방산 구매 결정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은 즉각 반발했다. 관영 매체들은 일본의 행보를 ‘군국주의 부활’로 규정하며 역내 국가들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다. 일본 무기를 도입하는 국가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외교적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압박이기도 하다.
일본 방산은 가능성 못지않게 한계도 뚜렷하다. 생산 능력 부족, 취약한 공급망, 숙련 인력 부족 등 '삼중고'다. 미쓰비시 중공업 · 가와사키 중공업 · IHI 등 주요 업체들은 오랫동안 자위대라는 사실상 단일 고객만을 상대해 왔다. 내수 위주 산업 구조에서 급격한 해외 수주 확대는 납기 지연과 품질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미쓰비시 중공업 스스로 단기간 내 수출 중심 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인정했다. 일본 평화헌법 제9조 기반의 국내 여론도 변수다. 수출 확대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정치적 여건 변화에 따라 정책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방산 수출이 일본 경제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한국은 강 건너 불구경할 여유로운 처지가 아니다. 동남아는 K-방산의 핵심 텃밭이다. 한국은 필리핀에 호세 리잘급 호위함을, 인도네시아에 장보고급 잠수함을 수출하며 이 시장에서 오랜 신뢰를 쌓아왔다. 베트남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K9 자주포를 도입했고, 태국은 4000t급 호위함 사업에서 한화 오션·HD 현대중공업이 경쟁 중이다. 최근 열린 2026 말레이시아 방산 전시회에서는 LIG가 해궁 미사일 수출 계약을 체결했고, HD 현대중공업은 현지 조선소·국방대학교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기술 이전·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까지 포괄하는 장기 파트너십 구조를 구축했다. 그런데 일본이 바로 그 시장에 중고 함정을 무상 또는 저가로 공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단기적으로 30년 된 구형 플랫폼이 새 함정과 직접 경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공짜 군함으로 단기 전력 공백을 메운 나라는 신규 발주 시점을 늦출 수 있고, 그 사이 일본은 정비·훈련·후속 지원으로 관계를 굳힌다. 일본산 중고 군함에 익숙해진 동남아 국가들이 차기 신형 함정도 일본산으로 선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일본 중고함 자체가 아니라 이 ‘패키지 진입 전략’의 장기 파급효과다.
이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일본과는 경쟁하고 동남아 수입국들과는 협력을 심화하는 '이중 전략'이다. 함정·잠수함 분야는 빠른 납기, 풍부한 수출 경험, 높은 가성비를 앞세워 맞불을 놓되 전차·자주포·유도무기처럼 일본이 글로벌 시장에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분야에서는 격차를 더 벌려야 한다.
한국도 신무기 수출에만 집착하지 말고 동남아 국가들의 예산 현실에 맞게 퇴역 예정 장비도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 환경에서 꾸준히 훈련하고 정비한 한국산 중고 무기는 동남아 국가들에 충분히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신제품 수출·기술 이전·현지 생산 패키지와 연계하면 일본의 중고함 공세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이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마닐라 정상회담에서 방산기업의 필리핀 현대화 사업 참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도 그런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이제 ‘무기를 만들되 팔지 않는 나라’에서 ‘만들고 파는 나라’로의 전환을 공식화했고, 그 첫 번째 전장이 동남아가 되고 있다. K-방산이 20년 공들여 쌓아온 바로 그 시장이다.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수십 년간 동남아 자동차 시장을 선점한 일본이 한국·중국 브랜드의 거센 도전에도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처럼, 이번에는 거꾸로 한국이 먼저 진출한 방산 시장을 지켜야 하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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