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꽃·나무에 ‘잘 잤니’ 인사… 한국의 풍경은 그 자체로 그림”[M 인터뷰]
한국 1세대 조경가 여성 최초 국토개발 기술사 정영선
어릴적 아버지 학교 화단 가꿀때 내가 늘 ‘물지게’ 담당
‘희원’에 한국적 조경 적극 반영… 진짜 조경 인생 시작
서울아산병원, 조용히 울 수 있는 위로·재충전 공간 설계
가는 곳마다 출렁다리… 어렵게 걸어야 보이는 것도 있어
‘반려식물’ 표현 어불성설… 우린 언제나 식물과 함께 살아

건축에 비해 덜 조명받고,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조경(造景). ‘경치를 꾸미다’라는 뜻의 이 말은 사실 서양의 ‘풍경 건축(landscape architecture)’에서 왔다. 자연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즐기는 우리 문화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최초로 국토개발 기술사 자격증을 취득(1980)한 정영선(85) 조경가는 이 복잡미묘한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꾸미는 것은 아니되, 정성을 들여 매만진 경치,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한국식 조경’을 이뤄내기 위해. 그래서 그의 조경 인생 60년은 한국 조경의 역사이고,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보여준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 한국종합무역센터, 대전 엑스포, 인천국제공항의 조경 설계를 맡았고, 서울아산병원 중앙공원과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을 탈바꿈시켰다. 여기에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미국 뉴욕의 원다르마센터까지.
무수히 많은 공간을 어루만지며, 인간과 자연을 사유해 온 정 조경가를 지난 19일 그가 대표로 있는 서울 강남구 서안설계사무소에서 만났다. 가장 먼저 그의 손가락 끝에 시선이 꽂힌다.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자연스레 물든 흙 때.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얼굴. 그의 작은 몸에 자연이 스며들어 있었다.
―오늘도 정원에서 일하셨지요? 매일 아침 꽃과 나무에게 ‘잘 잤니’라고, 외출할 땐 ‘다녀올게’라고 인사하시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봤어요.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마당을 둘러봤지요.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잡초도 뽑고 이래저래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어요. 밥 먹는 것도 잊고, 사실 오늘 인터뷰도 깜빡할 뻔했지 뭐야….”(웃음)
―양평 자택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계신 걸로 알아요. 지금 한창 꽃들이 만발할 때 아닌가요. 선생님 마당엔 어떤 꽃들이 있나요?
“우리 집 마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나리아재비를 잔뜩 심었지요. 우리나라에선 미나리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영어로는 ‘버터컵’이라고 해요. 자그마한 노란 꽃이 피는데 그게 버터를 담는 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한창 예쁘게 피었다가, 이제 지기 시작했어요. 말로 해서 무슨 소용 있나. 언제 한번 놀러 와요.”
―새삼스럽지만, 조경가가 되신 계기 기억나시나요? ‘조경’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처음 생긴 조경학과에 입학하셨어요.
“아주 소중한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가 나무와 풀, 꽃을 무척 좋아하시고, 잘 가꾸셨죠. 특히 아버지는 옥잠화를 제일로 쳤는데, 늘 집 마당에 심고 계시던 모습이 생생해요. 또 교사 일을 하셔서 전근을 자주 다니셨는데, 늘 학교 화단부터 챙기셨어요. 그때마다 물지게 담당은 장녀인 나였지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꽃에 물 주고, 자라는 걸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네요.”
―선생님의 조경 인생의 바탕은 바로 그 추억이군요. 선생님의 조경을 ‘한국적 조경’이란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규정하는 ‘한국적 조경’은 무엇인지요.
“한국 조경은 개인 집이나 정원에 무언가를 심어 예쁘게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어요. 우리네 옛 선비들이 중시한 것은 차경(借景)이지요. 주변 경치를 정원의 일부처럼 활용한다는 의미예요. 나지막한 담 너머로 물이나 산, 과수원 등을 바라보는 거죠. 중국이 축경, 즉 자연경관을 본떠 정원 안에 꾸민 풍경을 중시한 것과 대조적이죠. 우리나라 경관은 충분히 아름답고, 풍부하고, 다양해요. 그래서 차경정원이 많았고, 나 역시 이를 고려한 조경을 이어가려 해요.”
―한국인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모색이 강조되면서 이제 숲, 정원, 조경이 일상에 깊게 밀착된 느낌입니다. 지금 한국의 경관은 어떤가요.
“요즘 좀 재미가 없어. 시민 편의도 좋은데, 너무 인간의 편리함이 우선시되니까…. 걷기 좋고 쉬운 길도 의미 있지만, 조금 어렵게 걸어야 볼 수 있는 것, 얻어지는 것도 있잖아요. 또 왜 가는 곳마다 출렁다리를 만들고 그래. 물은 무조건 건너야만 하는 것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멀쩡한 땅 파헤쳐서 국적불명의 꽃을 마구잡이로 심는 거야. 에이, 그만 말합시다. 개인적으로 좋고 싫은 것들이 있지만, 다 누군가의 수고로 이뤄진 건데, 어찌 다 말해….”
―워낙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많이 맡아오셨는데요. 특히 기억에 남거나, 조경 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업이 있다면요.
“‘한국적 조경’을 마음껏 실현한 사례로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의 정원인 ‘희원’(1997)이고, 전심으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전력했던 건 서울아산병원 중앙공원(2007)이지요. 둘 다 내가 꿈꿔오던 그 모습 그대로 구현됐어요. 그토록 조경가를 믿어주고, 전권을 주는 고객들은 흔치 않지요.”
―하나는 예술을 품은 곳, 하나는 아픔을 품은 곳이네요. 선생님 작업의 깊고 넓은 스펙트럼이 느껴지는 사례들입니다. 희원이 완공된 1997년으로 먼저 가볼까요. 그곳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조경 인생’의 시작은 사실 이때부터예요. 그 전까지 아시안게임, 올림픽, 대전 박람회, 국립공원, 고속도로 관련 조경 사업, 즉 다 정부 일이었어요. 그러다가 희원을 만나니 정말 살 것 같았죠. 앞서 말한 우리 전통 정원의 조형미인 ‘차경’의 원리를 적극 반영한 곳이에요. 처음 미술관이 만들어질 땐 국내 전문가가 없어서 일본인들이 작업했었대요. 그러다 미술관 15주년 때 ‘우리 정원’으로 재탄생했죠. 당시 쟁쟁한 외국 회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지원한 걸로 알아요. 그렇지만 고 이건희 회장께서 강하게 저를 추천하셨다고 들었어요. 희원을 만나고 ‘진짜’ 조경가 정영선이 탄생한 겁니다.”
―희원이 ‘한국적 조경’으로 예술적 감흥을 배가하는 장소라면, 아산병원의 정원은 아픔을 보듬는 곳입니다. 주차장을 없애고 만든 숲으로도 유명하고요.
“예쁘고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 위로와 재충전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설계했어요. 누군가는 도시락을 먹고, 누군가는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조용히 울 수 있는 곳…. 병원은 모두 지치는 곳이잖아요. 환자도 가족도, 의료진도요. 그 속에서 모두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특별히, 병원 공원 조경에 영향을 준 기억이 있으신가요.
“남편이 오랫동안 투병을 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했죠. 그런데 왜 이렇게 병원마다 울 곳이 없나요. 여느 곳보다 울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데…. 심지어 한 요양병원에선 병실 창문 밖으로 화장장이 보이더라고요. 억장이 무너졌어요. 그래서 아산병원에서의 정원 설계가 남다르게 다가왔어요.”
―위로와 희망, 재충전을 위해 선택된 나무와 꽃이 궁금합니다.
“씩씩하게 뻗은 활엽수를 전면에 배치했어요. 또 병실을 잘 나오지 못하는 환자들이 내려다보고 ‘나도 나가야겠다’는 의지를 품도록 이른 봄부터 움트는 수목을 심었지요. 직선 코스를 지나면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을 수 있도록 변화도 줬고요. 몇 번 다시 가봤는데, 사람들이 내가 상상한 대로 정원을 잘 쓰고 있더라고요. ‘잘됐다’ ‘참 좋다’ 싶지요.”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조경 작업이 현대미술의 지위를 획득한 사건이었죠. 지난해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소개돼 주목받았는데요.
“현대미술관에서 조경 전시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더라고요. 막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 아닌가 싶었어요(웃음). 너무 고맙고 감사하죠. 우리 분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준 격이니까요. 이탈리아 전시는 그쪽 사람들이 같은 내용을 다르게 보여줘서 재밌었고, 많이 배웠어요. 한국의 풍경, 나무와 꽃, 정원이 그 자체로 ‘그림’이라는 걸 알렸으니 기쁘지요. 현지 관객들에게 인기도 아주 좋았다고 해요.”
―60년 ‘조경 인생’ 외길을 걸어오셨어요. ‘조경’이 없던 나라에서, 1세대 조경가로 이름을 알리셨고요. 지금은 ‘반려식물’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꽃, 나무, 숲, 자연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돌아보면 어떠신지요.
“반려라니, ‘나’를 위한 식물이라는 건가요. 난 그 말이 별로야. 우린 늘 식물과 함께 살아왔어요. 같이 안 산 적이 없어요. 반려식물은 어불성설이죠. 실내에 꽃, 나무 몇 개 두고 왔다 갔다 하며 보는 게 ‘반려’인가. 우린 그냥, 늘 모두와,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있어요.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들 말이에요. 그걸 생각하고, 그걸 위해 사세요. 그럼 됩니다.”

■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 선정
본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정영선 조경가는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내 ‘땅’을 쫓는다.
정 조경가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운영한 경북 경산의 과수원을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낙원, 영원한 그리움의 장소”라고 했다. 사방이 논과 깊은 반석 위로 흐르는 시냇물로 둘러싸인 곳. 할아버지 사랑방 큰 유리창에 사과꽃이 눈처럼 날리고, 바위와 바위 사이에선 백합이 피었다. “그것이 조경과의 첫 조우가 아니었을까요. 가슴속에서 지울 수 없는 그 풍경들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어요.”
그의 조경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향한다. 자연을 통제하거나 꾸미지 않고, 땅이 품어온 역사와 생태적 흐름을 읽어내, 그 위에 인간의 공간을 조심스럽게 얹는다. 선유도공원 설계가 대표적. 낡은 정수시설의 구조물을 허물지 않은 채, 자연으로 감쌌다.
할아버지가 창조한 낙원엔 아파트와 도로가 생겨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정 조경가가 가장 좋아하는 ‘실존’ 정원은 어딜까.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 그리고 열정적인 ‘정원사’였던 헤르만 헤세가 가꿨던 그 정원을 사랑한다고 했다. 독일과 스위스 접경지대 호숫가에 자리한 곳. “그곳엔 꽃과 나무만 있지 않아요. 헤세의 시와 철학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2024년 정 조경가는 조경 분야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를 열었다. 기세를 모아 지난해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도 ‘한국 조경’을 세계에 알렸다. 여든을 훌쩍 넘겨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최근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2006년 고 정세영 HDC그룹 명예회장의 애칭을 따 제정된 상으로, 상금은 3억 원이다. 시상식은 오는 28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다.
▶▶ 1세대 조경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기자생활을 하다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에 입학해 1호 졸업생이 된다. 이후 여성 최초로 국토개발기술사를 따내며 본격적으로 조경계에 발을 들였다.
▶▶‘차경’의 조경 철학
자연의 아름다움을 빌려오는 ‘차경’으로 한국적 조경 추구.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경관 설계로 유명하며 대표 작업으로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서울아산병원 중앙공원 등이 있다.
▶▶ 조경계 노벨상 수상
2023년 세계적 조경가에게 주는 제프리 젤리코상을 받았으며,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 최초 전시를 열었다. 올해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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