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설악은 까칠해' vs 설악 '지리는 지루해' [산 대 산]
두 산의 매력을 드러내고자 토론 형식을 빌렸을 뿐, 우열을 가리려는 목적이 아님을 밝힙니다.


지리산
모두가 내 품에 안겨 살아. 내 치맛자락에 있는 행정구역만 5개야.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지. 화개장터 알지? 거기도 내 품에 있어. 이게 뭘 의미하냐면, 나는 단지 어느 한 지역의 산이 아니라는 거야. 내 품에 들어오면 그 어떤 경계도 산산이 무너지고 흩어져.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어머니의 산'이라 부르지. 한반도 아랫목에서 만물을 굽어보고 살피거든. 그에 반해 너는 북동쪽 끄트머리에 붙어 있잖아. 위치 선정부터 이미 나와 상대가 안 돼.
설악산
치우쳐 있다고? 덕분에 나는 눈 시린 푸른 바다를 지녔지. 육지에 갇혀 있는 너는 답답하지 않니? 산에서 보는 동해바다가 얼마나 멋진데. 옛말에 '지자요수 인자요산'이라 했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지. 나는 그 둘을 다 가졌으니 완성형인 셈이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데, 물 구경하기 힘든 너와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네?
지리산
천만에 말씀! 내 이름 '지리智異'가 무슨 뜻인지 알아?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뜻이야. 삶에 지친 많은 이들이 내 능선을 하염없이 걸으며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해. 이건 오직 나만이 가진 길고 부드러운 능선의 힘이야. 능선을 걷는다는 건 평지를 걷는 것과 의미도, 느낌도 전혀 다르지. '종주'라는 단어 앞에 가장 어울리는 산,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설악산
종주? 좋지. 그런데 산에 수평만 있니? 나에겐 수직의 세계도 있어. 네게는 가끔 보이는 귀한 바위가 내겐 지천으로 널렸거든. 히말라야와 알프스로 떠나는 이 땅의 숱한 산악인들은 내 안에서 꿈을 키웠어. 실내암장에서 힘을 기르던 클라이머들이 결국에 찾는 곳도 나지. 공룡능선과 울산바위의 위용을 봐. 괜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암절벽이 아니라고. 북한에 금강산이 있다면 남한에는 나, 설악산이 있어.
지리산
바꿔 말하면 너는 그만큼 척박하고 까칠하다는 거야. 등산객들이야 찾아오겠지. 그런데 네가 거느린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중요한 건 내품에 코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나는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서 있고, 굽이굽이 사람 사는 냄새와 전설이 서려 있어. 섬진강·남강·황강 모두 나로부터 시작돼. 사람들은 나의 젖줄에 기대어 살아. 내가 괜히 여러 대하소설의 무대가 된 게 아니라고.
설악산
대신 나는 예술가들의 영원한 뮤즈지. 산꾼들 사이에 낭송되는 진교준 시인의 '설악시 얘기' 들어는 봤어?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이 황홀한 바위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자신을 성찰하게 돼. 네가 역사와 이념을 아우르는 묵직한 서사시라면, 나는 한 인간의 오감을 깨우는 서정시라고 할 수 있지.
지리산
솔직히 너는 남북분단 전까지 금강산의 아류 취급 받았잖아. 반면에 나를 봐. 1967년 지정된 대한민국 국립공원 1호라고. 명실상부 국민 모두의 산이 된 거야. 예로부터 백두산·한라산과 함께 한반도의 삼신산三神山 또는 민족의 영산으로 불린 역사가 있어. 정상석에 새겨진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야. 천왕봉에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느껴.
설악산
네가 국립공원 1호라면, 나는 세계가 인정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국내 1호야. 그리고 이름값보다 중요한 건 결국 콘텐츠지. 해발 1,500m가 넘는 산 중에 이런 화강암 비경을 가진 산이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다들 너처럼 심심한 흙산들뿐이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는 어디에 있게?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일단 천불동계곡 한번 들어와 보면 거울에 비친 네 모습이 영 싱거울 거야.
지리산
그 화려함도 자꾸 보면 물리는 법이야. 나는 평양냉면처럼 첫맛은 슴슴하지만 쉽게 질리지 않지. 젊을 땐 화려함에 끌리다가도, 결국 나이 들면 다들 담백함을 찾아. 네가 전시된 예술품 같다면, 나는 오래된 고향 집 같지. 해발 1,500m에 펼쳐진 넉넉한 벌판, '늙은 할머니' 같은 노고단, 이름부터 신비로운 뱀사골과 피아골은 오직 나만이 품을 수 있는 것들이야.
설악산
고향 집도 일단 가기가 편해야지. 나는 이제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는 반나절 생활권이야. 한계령과 미시령 옛길을 넘던 고생은 옛날 이야기라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등산객도 나를 더 찾잖아. 그건 곧 내가 세계 기준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K-마운틴'이라는 뜻 아니겠어?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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