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스틸러] 선비도 홀린 초록 한쌈…‘어우야담’ 속 쌈채소

장다해 기자 2026. 5. 2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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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침스틸러] (25) 고전문학 ‘어우야담’ 속 쌈채소
푸릇푸릇 잎사귀에 잘 익은 고기 한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한국 고유 쌈문화
조선 팔도 ‘보고 들은 이야기’ 엮은 책
입담 좋은 김인복 상추쌈 묘사가 압권
선비 골탕먹이고 갓끈 끊긴 야담 전해
익산 ‘애벌레 농장’ 25종 쌈채소 재배
향·식감 달라 곁들인 음식맛도 제각각
김훈 애벌레 농장 대표가 직접 차려낸 제육볶음과 갓 딴 쌈채소. 쌈채소에 따라 입안에 남는 고기 맛과 여운도 제각각이다. 사진=김도웅 프리랜서 기자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한번 먹어본 음식은 설명만 들어도 군침이 돌아 사람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그중에서도 쌈은 집에서건 밖에서건 누구나 먹어봄 직한 데다 푸릇푸릇한 잎사귀에 기름진 고기와 조화를 이루는 맛도 훌륭하다.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고유한 식문화, 생채소로 쌈 싸 먹는 그 맛을 재치 있는 입담으로 풀어내 길 가던 선비의 발걸음을 붙잡은 인물이 있다.

‘어우야담’이라는 책에 나오는 김인복의 이야기다. ‘어우야담'은 1621년 조선 광해군 시기 문신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엮어 낸 책이다.

‘어우야담’ 책 표지 일러스트. 출판사 ‘웅진주니어’

말솜씨가 좋고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김인복이란 사람이 어느 날 길에서 시골 선비를 만난다. 그는 수정 구슬을 꿰어 만든 갓끈을 턱 바로 밑까지 매고 있었다. 당시 갓끈은 갓을 머리에 고정하는 동시에 신분·취향·재력을 드러내는 장신구였다. 이 선비는 반짝이는 갓끈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도록 한껏 멋을 부린 것이다.

인복은 선비를 골탕 먹이고 싶어졌다. 그에게 수정 갓끈이 너무 멋있다며 한바탕 칭찬 세례를 퍼붓는다.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 갓끈을 사고 싶으니 다음날 자기 집으로 찾아오라고도 전한다. 이튿날 선비가 집을 찾아오자 그를 채마밭 위에 놓인 평상에 앉혀놓고는 갑작스레 화려한 언변으로 상추 찬가를 펼친다.

“지금 당신이 앉은 채마밭이 좀 기름지고 걸어야지. 상추가 얼마나 잘되는지 3∼4월경에 갈아서 거름을 충분히 주면 이슬을 머금고 비를 맞아 잎이 파초처럼 너푼너푼 자라서 연하고 싱그러운 모양이라네. 그걸 대바구니에 넘치도록 따 담는단 말씀이야. 한번 씻어낸 상추 물기를 탈탈 털어 손바닥 위에 놓고 윤기 도는 쌀밥 한 숟가락을 뚝 떠서 달고 고소한 된장도 얹어야지. 그 위에 노릇노릇 구워진 밴댕이를 올리고 장사꾼이 짐을 번쩍 들듯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종루(鐘樓)에 파루(罷漏)친 후 남대문 열리듯 입을 떡 벌리고 밀어 넣는데….”

선비는 여기까지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만다. 짧은 갓끈은 그만 뚝 끊어지고 떨어진 수정알이 사방으로 튄다. 결국 그는 갓끈은 팔지도 못한 채 군침을 줄줄 흘리며 돌아갔다.

겉멋이 잔뜩 든 선비가 그토록 아끼는 갓끈을 망가뜨리려는 인복의 공작에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우리네 조상 특유의 골계미가 배어나는 장면이다. 특히 쌈을 싸 먹을 때 그 치밀한 묘사가 압권이다. 선비가 그러했듯 초록빛 쌈채소에 이것저것 올려 한가득 싸서 먹는 모습이 훤히 그려져 쌈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지천이 푸르른 봄볕. 상상만으로 넋을 잃게 하는 싱싱한 쌈채소를 맛보러 전북 익산시 오산면에 있는 ‘애벌레 농장’으로 향했다. 김훈 대표(54)는 3636㎡(1100평) 규모 시설하우스에서 13년 동안 많게는 스물다섯 종류의 쌈채소를 재배해왔다.

전북 익산 ‘애벌레 농장’에선 청겨자(왼쪽 위부터), 케일, 적겨자, 롤라로사, 셀러리, 적근대 등 수십 종류의 쌈채소를 만날 수 있다. 사진=김도웅 프리랜서 기자

쌈채소 종류가 이렇게 많았다니. 잎이 부드럽고 단맛이 감도는 유럽형 상추로는 이태리상추·롤라로사·버터헤드·카이피라·프릴라이즈·로메인·오크리·적오크리가 있다. 청겨자·적겨자·적생채·러시안레드는 알싸한 향과 맵고 쌉싸래한 맛이 도드라져 고기와 곁들이기 좋다. 줄기의 씹는 맛이 살아 있는 케일·적근대·황근대·셀러리도 만나볼 수 있다.

김 대표는 ‘농부 요리사’를 꿈꾸며 갓 딴 쌈채소와 잘 어울리는 ‘한 쌈 특선’을 구상한다. 사진=김도웅 프리랜서 기자

쌈의 화룡점정은 같이 곁들여 먹는 음식이렸다. 요리도 좋아한다는 그는 2021년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언젠가 ‘파머 셰프(Farmer Chef·농부 요리사)’로서 초밥 코스 요리처럼 ‘한 쌈 특선’을 선보이고 싶단다.

“쌈채소마다 맛이나 향·식감이 다르잖아요. 그에 맞춰서 올려 먹기 좋은 음식도 함께 드리고 싶어요. 먹거리끼리 궁합을 보여주는 거죠.”

예를 들어 갈치속젓을 시원한 쌈배추에 올려 먹으면 짭조름한 감칠맛이 살아난다. 잎만 살짝 데친 적근대와 멸치조림을 함께 싸 먹으면 비린 맛 대신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풍미를 끌어낸다. 제육볶음은 부드러운 생채나 알싸한 겨자잎을 감싸 먹으면 산뜻해진다.

김 대표가 직접 차려낸 제육볶음과 갓 딴 쌈채소로 한 쌈 싸 먹을 차례. 먼저 김 대표가 추천한 대로 ‘아삭이상추’라고도 불리는 생채 위에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을 올린다. 큼직하게 썬 돼지고기를 되직한 고추장 양념에 재운 제육볶음까지 올려 복스럽게 싸서 먹어본다. 여린 생채가 매콤한 고기 맛을 돋운다. 풋풋한 단맛이 나는 버터헤드와도 싸 먹어보고, 상큼한 셀러리와도 맛본다. 쌈채소에 따라 입안에 남는 고기 맛과 여운도 제각각이다.

쌈채소를 한장씩 바꿔 싸 먹다보니 문득 아직 봄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더운 여름 풀들이 시들기 전에 좋아하는 반찬 하나를 올려 저마다 다른 향과 식감을 지닌 쌈채소를 맛보는 건 어떨까. 푸른 잎이 선사하는 산뜻한 기운을 찬찬히 음미하다보면 갑작스레 떠날 채비를 하는 봄과의 이별이 그리 아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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