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행기에서 본 반도체의 미래[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2026. 5. 2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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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밤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리면 어둠 속 도시의 풍경이 마치 반도체 집적회로(IC)처럼 보인다. 경이로운 순간이다. 움직이는 자동차의 불빛은 전자의 흐름 같다. 수직으로 솟은 건물의 불 켜진 창들은 3차원의 집적회로처럼 빛을 간직하고 있다. 마치 낮 동안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란 존재가 반도체 속 양자와 같이 느껴진다.

메모리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1983년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리는 ‘도쿄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에서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라고 말했다. 지금 반도체를 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고까지 했다. 그 말 속에는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 구상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43년이 지났다. 2026년,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약 4분의 1을 책임지는 대표 산업이 됐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쌀’이 된 것이다.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집적회로의 핵심 원리는 1958년 미국의 전자공학자 잭 세인트 클레어 킬비에 의해 최초로 발명됐다. 이전에는 트랜지스터를 하나씩 전선으로 연결했다. 회로가 복잡해질수록 배선이 늘어났고, 연결 오류로 인한 고장도 잦아졌다. 생산비 역시 증가해 부품 수가 많아지면 제조 자체가 불가능했다. 킬비는 아주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부품들을 따로 만들까? 모두 하나의 반도체 위에 만들면 되지 않을까?’ 전자부품 전체를 하나의 반도체 기판 위에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킬비는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켰다.

그는 1958년 5월 반도체 회사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 입사해 집적회로를 구상했고, 그해 9월 최초의 집적회로를 제작해 성공적으로 시연했다. 그의 천재성도 놀랍지만, 신입사원에게 이런 창의적 기회를 허락한 회사 문화 역시 인상적이다. 그의 집적회로 발명은 이후 반도체 산업의 핵심 기술이 됐다. 그는 이 공로로 200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킬비의 집적회로 기술은 현대 메모리반도체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1966년 미국 IBM 연구소의 로버트 히스 데너드는 트랜지스터 1개와 축전기(커패시터) 1개만으로 1비트를 저장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했다. 이는 오늘날 D램의 기본 원리가 됐다.

최근 메모리반도체 기술의 발달로 한때 건물 한 층이 필요했던 대형 도서관급 정보저장공간은 이제 손바닥만 한 크기로 축소됐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인공지능(AI) 시대에는 메모리의 처리 속도 자체가 곧 컴퓨팅 성능이 되고 있다.

집적회로의 미래는 어떨까? 반도체 산업이 막 시작되던 1980년대의 서울 풍경과 지금의 서울 풍경을 비교해 본다. 2차원의 평면 구조에서 3차원의 거대한 적층 구조로 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40년 후 반도체 집적회로의 구조는 어떤 풍경일까? 어쩌면 복잡한 지상을 떠나 하늘에 떠 있는 또 다른 도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손톱만 한 공간 안에 도시 자체가 통째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은 과연 공상에 가까운 이야기일까, 아니면 미래 기술이 향하게 될 현실의 풍경일까.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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