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분철 사기

‘영리한 소비’의 미덕은 소유보다 공유다. 비싼 값을 치르고 혼자 사용하는 대신, 나눠 쓰고 비용을 줄인다. 값을 쪼개는 이른바 ‘분철’은 아이돌 덕후들 사이에서 익숙한 구매전략이다. 여러 장의 앨범을 함께 산 뒤 각자 원하는 멤버의 포토카드와 엽서, 스티커를 나눠 갖는다. 콘서트 티케팅과 팬사인회 응모, 응원봉 공동구매까지 팬덤 소비의 영역 전반으로 확장됐다. 해외 공연 원정에서는 호텔방과 택시까지 분철할 정도다. 랜덤과 한정판으로 희소성을 부추기는 굿즈 시장에서 분철은 덕후들의 팬심이자 문화가 됐다.
덕후들의 분철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시장으로도 번졌다. “라프텔 4인 구해요” “마지막 한 자리 남음” X(옛 트위터)와 오픈채팅방 등 SNS에는 구독료 분철 모집글이 넘쳐난다. 계산은 단순하고 꽤 설득력 있다. 애니메이션 OTT 라프텔의 경우, 월 구독료 1만4천900원, 4명이 모이면 3천725원이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수만 편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 소비처럼 보인다. 혼자 내고 보는 사람이 호구로 느껴지는 구조다. 넷플릭스가 계정 공유를 틀어막자 이용자들이 다른 플랫폼으로 흩어지며 분철 문화는 더 일상화됐다. 플랫폼이 벽을 쌓으면, 사람들은 담 너머로 분철 사다리를 넘긴다.
문제는 분철의 선한 기능만큼 사기의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몇 천 원쯤이야’ 소액 거래를 노린 먹튀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부천에서는 라프텔 계정 분철을 미끼로 피해자 12명을 속인 20대 여성이 구속됐다. 구독 계정 하나를 만든 뒤 SNS로 참가자를 모집해 돈만 받고 잠적했다. 앞서 지난해에도 130여명에게서 1천만원가량을 가로챈 20대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분철 사기 사건이 실제 수사와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피해가 소액이다 보니 신고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 결국 적은 돈일수록 범죄의 문턱은 오히려 낮아진다.
이제 챗GPT와 제미나이 같은 AI 서비스 구독까지 분철 대상이 되고 있다. 분철 사기는 단순한 개인 일탈이라기보다 비싼 문화 소비와 팍팍한 경제 현실, 그리고 익명 플랫폼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역설에 가깝다. 사람들은 더 적은 돈으로 더 많은 문화를 누리기 위해 의기투합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이 도사린다. 관계는 넓어졌지만 신뢰는 얕아졌다. 분철 사기는 초연결 시대의 그늘이다.
/강희 논설위원
Copyright © 경인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