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 무모해 보이는 삶이 당사자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삶일 수 있어[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시지프 신화 속 시지프는 신들의 눈 밖에 난 인간이었다. 그의 형벌은 단순했다.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것. 하지만,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밀어야 했다. 이 형벌이 잔혹한 이유는 영원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 무의미함에 있다.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어차피 다시 시작될 일을, 그는 왜 계속 밀어야 하는가. 그래서 신들은 그것을 벌로 고안했다. 반복되는 헛수고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힘보다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다시 내려가는 그 발걸음이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무엇이 남는가. 올라온 기억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카뮈는 이 신화를 다르게 읽었다. 그는 시지프가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은 의아해한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하지만 카뮈가 말한 행복은 만족이 아니었다. 바위를 밀어올린 후 다시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그것과 맞선다. 신들이 원한 건 굴복이었다. 그리고 시지프가 거부한 것도 그것이었다. 체념도, 탈출도 아닌 정면 응시. 흐름에 쓸려가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 자체가 그에게는 저항이었다.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의지를 쥐고 있었다. 신들이 설계한 허무를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이 신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형벌은 끝나지 않는다. 바위는 내일도 굴러 떨어진다. 그렇지만, 굴러 떨어지는 바위보다 더 완강하게 그는 다시 산을 오른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자신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연어의 삶은 우리에게도 낯설다. 바다에서 자라 강으로 돌아오는 삶,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어는 돌아오는 길 내내 거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 아래로 흐르려는 강의 힘에 맞서 온몸으로 밀고 올라간다. 폭포 앞에서도 몸을 던진다. 곰의 발톱 앞에서도, 독수리의 부리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상류에 닿은 연어는 알을 낳고 죽는다.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다. 지느러미는 해어지고 살점은 뜯겨 있다. 그 모습은 처절하고 또 어딘가 숭고하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묻는다. 왜 저러는 걸까. 더 안전하고 더 풍요로운 바다를 놔두고 상처만 남는 길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어에게 그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슬러 오르는 것이 삶의 방향이고 목적이다. 포식자를 피하는 것도 몸을 보호하는 것도 그 앞에서는 부차적인 문제다. 경의롭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연어는 흐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물살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몸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그럼에도 오른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연어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삶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무모해 보이는 이유는 결과가 뻔해 보이기 때문이다. 연어에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거슬러 오른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자신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