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 무모해 보이는 삶이 당사자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삶일 수 있어[김윤지의 애살맞아 생긴 일]

주찬우 기자 2026. 5.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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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스른다는 것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흐르는 물은 가둘 순 있어도 막을 순 없으며 시간은 더더욱 그렇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않든 우리의 삶은 매분 매초 흘러가고 있다. 단,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 모두 그 거대한 힘에 순응하며 같은 속도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물 위에 나란히 떠내려가는 나뭇잎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기준 삼아 제자리인 줄 착각하며 흘러간다. 그렇기에 이 흐름을 거스르려는 자의 등장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흐름에서 이탈한 나뭇잎 하나가 눈에 띄듯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는 단번에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모함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스르는 자들에게는 저마다 흐름보다 강한 무언가가 있다. 방향이다.
흐르는 강물은 막을 수 없다. 우리는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김윤지

시지프 신화 속 시지프는 신들의 눈 밖에 난 인간이었다. 그의 형벌은 단순했다.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것. 하지만,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그것을 밀어야 했다. 이 형벌이 잔혹한 이유는 영원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그 무의미함에 있다.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어차피 다시 시작될 일을, 그는 왜 계속 밀어야 하는가. 그래서 신들은 그것을 벌로 고안했다. 반복되는 헛수고야말로 인간을 가장 잘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힘보다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다시 내려가는 그 발걸음이 더 가혹한 형벌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무엇이 남는가. 올라온 기억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카뮈는 이 신화를 다르게 읽었다. 그는 시지프가 행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이 문장을 읽는 사람은 의아해한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하지만 카뮈가 말한 행복은 만족이 아니었다. 바위를 밀어올린 후 다시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고 그것과 맞선다. 신들이 원한 건 굴복이었다. 그리고 시지프가 거부한 것도 그것이었다. 체념도, 탈출도 아닌 정면 응시. 흐름에 쓸려가기를 거부하는 것, 그것 자체가 그에게는 저항이었다.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의지를 쥐고 있었다. 신들이 설계한 허무를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이 신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형벌은 끝나지 않는다. 바위는 내일도 굴러 떨어진다. 그렇지만, 굴러 떨어지는 바위보다 더 완강하게 그는 다시 산을 오른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자신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사람이었다. 기사도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는 홀로 갑옷을 두르고 말에 올랐다. 풍차를 거인으로 보았고, 여관을 성으로 보았으며 양 떼를 적군으로 보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를 비웃었다. 미쳤다고도 했고 가엾다고도 했다. 흐름이란 언제나 다수 편이다. 기사의 시대는 끝났고 세계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홀로 역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다. 풍차 날개에 창을 들이밀다 나뒹구는 그 모습은 거스르는 자의 전형적인 결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끝내 놓지 않은 것이 있었고, 그것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산초 판사는 끝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산초는 그에게서 낭만의 시대, 기사도 정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가 그린 이 인물은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을 몰랐던 게 아니라 그 방향을 거부한 것이다. 명예와 헌신과 이상이 살아있던 시절의 가치들이 아직 유효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놓지 않았다. 결국, 그의 무모함은 무지의 산물이 아니었다. 세계가 틀렸다는 확신이었고 혼자서라도 이행하겠다는 고집이었다. 광기와 신념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다수결로 정해진다. 그 다수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돈키호테였다. 창이 부러지고 몸이 나뒹굴어도 그것만이 자신의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나뭇잎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기준 삼아 제자리인 줄 착각하며 흘러간다. /김윤지

연어의 삶은 우리에게도 낯설다. 바다에서 자라 강으로 돌아오는 삶,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어는 돌아오는 길 내내 거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 아래로 흐르려는 강의 힘에 맞서 온몸으로 밀고 올라간다. 폭포 앞에서도 몸을 던진다. 곰의 발톱 앞에서도, 독수리의 부리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상류에 닿은 연어는 알을 낳고 죽는다.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다. 지느러미는 해어지고 살점은 뜯겨 있다. 그 모습은 처절하고 또 어딘가 숭고하다. 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묻는다. 왜 저러는 걸까. 더 안전하고 더 풍요로운 바다를 놔두고 상처만 남는 길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어에게 그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거슬러 오르는 것이 삶의 방향이고 목적이다. 포식자를 피하는 것도 몸을 보호하는 것도 그 앞에서는 부차적인 문제다. 경의롭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연어는 흐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물살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몸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그럼에도 오른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연어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삶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무모해 보이는 이유는 결과가 뻔해 보이기 때문이다. 연어에게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거슬러 오른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만이 자신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시지프의 바위는 굴러 떨어져도 그의 의지는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돈키호테의 창은 부러졌어도 그의 확신은 부러지지 않았다. 연어의 몸은 뜯겨나가도 그 방향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무지함 혹은 무모함이 아니다. 흐름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자기만의 방향이다. 거스른다는 것은 단순히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앎이 확실할수록 흐름은 더이상 기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을 보며 결과를 먼저 떠올린다. 저러다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지만 그들에게 결과는 처음부터 부차적인 문제였다. 가야 할 곳이 있었고 그 방향이 분명했다. 우리가 무모하다고 부르는 것과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거리는 어쩌면 외부에서 보느냐 내부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의 눈에 무모해 보이는 삶이 당사자에게는 유일하게 가능한 삶일 수 있다. 거스르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방향이 분명하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다. 다만, 거스를 만한 방향을 가진 사람만이 끝까지 오를 수 있다.

/김윤지 하동군 근무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