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영의 남도차문화〉찻자리가 일상이 되기까지
"천하의 좋은 차도 속된 손에서 많이 망가진다. (政所云 天下好茶多爲俗手所壞)"
위 글을 쓴 초의선사(조선 후기의 선승이자 한국 차문화의 정신과 법도를 정리한 인물)는 지리산 화개동 일대의 차밭을 높이 사면서도, 늦고 늙은 잎을 따서 햇볕에 말리고 장작불로 차를 마치 채소국 끓이듯 거칠게 달여내는 방식을 비판했다. 그 결과는 "빛은 짙고 탁하며 붉고, 맛은 매우 쓰고 떫다(濃濁色赤 味甚苦澁)"는 것이었다. 좋은 산지의 찻잎도 법도 없이 다루면 끝내 제 성질을 잃고 만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초의가 문제 삼은 것은 강한 불이나 깊은 익힘 자체가 아니다. 그가 비판한 것은 찻잎의 성질을 읽지 못한 채 거칠고 조야하게 다루는 솜씨였다. '동다송'(초의선사가 1837년 지은 한국 차문화의 대표적 고전)에서 초의는 차를 따는 일, 만드는 일, 달이는 일 모두에 정성과 법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화후(火候)가 고르게 맞아야 좋은 향이 드러난다고 했다. "화후가 고르게 맞아야 난향이 된다(火候均停 曰蘭香)"는 말은 차의 향과 맛이 단지 잎의 산지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제다는 불의 세기를 억누르거나 높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잎의 상태에 따라 알맞은 지점을 찾아가는 감각의 일이다. 초의선사의 차 정신은 결국 다선일치라는 말로 모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차는 삶과 동떨어진 신비한 차가 아니다. 차는 특별한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몸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향이 깊고 기운이 강해도 마시는 사람에게 부담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생활 속의 차가 되기 어렵다. 또한 적은 양, 낮은 물 온도로 맑고 편한 차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차가 일상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 차 양에 상관없이 누구나 취향에 따라 마실 수 있어야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다의 의미를 다시 짚어볼 수 있다. 야생차, 고차수(古茶樹,오래된 차나무)의 잎이 지닌 풍부함과 깊이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잎 안에 축적된 카테킨, 카페인, 아미노산 등 다양한 성분이 함께 작용하면서 그 산지 특유의 향과 맛을 만든다. 특히 카테킨류와 카페인은 차의 쓴맛과 떫은맛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 되며, 동시에 야생차와 오래된 차나무의 개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야생차와 구증구포가 유행처럼 소비되어서는 곤란하다. 야생차라는 이름만으로 차의 가치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구증구포라는 말만 붙는다고 곧바로 좋은 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구증구포는 특정한 전통을 흉내 내는 표지가 아니라, 잎의 강한 성질을 살피고 다스려 사람에게 편안하게 닿게 하는 하나의 제다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더구나 그것은 야생차에만 한정되는 방식도 아니다. 어떤 잎이든 그날의 상태와 산지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읽고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차를 만드는 사람의 기술과 연륜이다.

결국 차의 일상화는 좋은 찻잎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가 날마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잘 만들어져야 한다. 몸이 거부하지 않고, 마실수록 안정감을 주며, 산지의 풍미는 살아 있으되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닿는 차. 그런 차여야 비로소 일상다반사의 차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