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바냐 삼촌'… 130년 전 체호프가 건넨 '웃픈' 위로
연극 '바냐 삼촌'
5월 31일까지, LG아트센터 시그니처홀
“내가 내 인생을 낭비했어!”
- '바냐 삼촌’ 중에서 바냐 대사
바냐 삼촌이 절규하는 이 대사는 이 연극의 압도적 한 문장이다. ‘내 인생을 낭비한 장본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은, 참으로 가혹하지만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부친이 남긴 영지를 지키며 온 가족을(심지어 작고한 누이의 남편과 그의 새 아내까지!) 부양하는 바냐는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비로소 깨닫는다. 위대한 작가이자 학자라고 생각했던 누이의 남편 세레브랴코프가 실상은 예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하찮은 인간임을.
자신과 가족들은 검소한 생활을 견디며 전폭적으로 그의 생계를 지원하고, 심지어 밤마다 그의 책을 번역해 주며 모든 힘듦을 견뎠는데 말이다. 그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새로운 아내 엘레나와 결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전 매형에겐 분통을 터뜨리고, 그의 현 아내에겐 농반진반 추파를 던지며, 전 사위를 아직도 숭배하는 어머니에겐 직설을 서슴지 않는 바냐.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그를 관객들은 그러나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아니, 극이 시작하자마자 그에게 바로 빠져든다. 과거를 후회하느라 현재를 망치고 있는 바냐는, 생각보다 낯선 인간이 아니다.

꽤 오랜 기간 예능프로그램에서 예능인으로 소비되던 이서진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를 입증한다. 일단 ‘바냐’라는 캐릭터는 대중들의 뇌리에 박힌 ‘예능인 이서진’과 상당히 흡사하다. 입에 발린 표현 없이 자기 생각을 말하는 바냐(이서진)에게 관객들은 바로 몰입한다. 일단 관객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킨 이서진은, 극이 진행되면서 미묘하게 감정을 증폭시키면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구축한다.
배우가 대중에게 고착된 이미지와 엇비슷한 캐릭터를 맞는 것은 얼핏 안전해 보이지만, 가장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 ‘실제 모습일 뿐, 연기가 아니다’라는 오해를 심기 십상이다. 그러나 영민한 이서진은 대중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캐릭터라는 외피를,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인물 분석을 통해 촘촘히 채운다. ‘애써 연기하지 않는 듯한’ 고도의 계산된 연기 덕분에 극이 끝날 즈음 관객들은, 후회만 거듭하며 불륜도 불사하려는 그에게 깊이 공감한다.

“자연스럽게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견뎌야지"
- '바냐 삼촌' 중에서 소냐의 대사
바냐의 조카 소냐(고아성)는 극 중 나이가 제일 어리지만, 가장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비록 사랑에는 미숙하지만, 그녀는 인생의 진리를 이미 체득했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이 삶에서 도망가선 안 된다는 숙명(宿命)을 정확하게 인지한다. 목숨이 저절로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인생은 묵묵히 견뎌야 하는 여정임을 깨달은 현자(賢者)다.
그래서 자신만 아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이자 젊고 매혹적인 여성과 재혼한 아버지를 지극히 봉양하는 것도 소냐다. 집안의 주치의 겸 바냐 삼촌의 친구인 의사 아스트로프를 짝사랑하지만, 실은 그는 소냐의 계모인 엘레나를 열렬히 흠모한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아도, 그리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기엔, 그녀 앞엔 반드시 견뎌내야 할 현실이 먼저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총을 쏜(다행히 빗나갔지만) 바냐 삼촌도 소냐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바냐 삼촌을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영지를 지키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삶도 책임진다. 소냐 역을 맡은 고아성은 첫사랑에 설레고 들뜬 상황부터 40대의 바냐 삼촌을 위로하는 의젓한 장면까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연기한다.
특히 자칫 전형적인 연기로 흐를 수 있는 역할임에도 그녀는 중심을 딱 잡는다. 덕분에 삼촌과 조카 관계지만, 정신적으로는 소냐가 바냐를 구원하는 마지막의 울림이 깊다. 바냐는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면 좋겠어, 나도 내 과거를 모르게”라고 칭얼거리지만, 소냐는 생이 끝나고 하늘나라에 가면 “천사가 위로해 줄 거야”라고 다정하게 위로한다.

연극집단 ‘양손 프로젝트’ 양종욱-손상규 의기투합
1897년 최초로 출간된 희곡 ‘바냐 삼촌’은 세계적 대문호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 체호프의 4대 희곡(벚꽃 동산, 세 자매, 갈매기, 바냐 삼촌) 가운데 하나다. 19세기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체호프는 시와 희곡에서 동시에 걸작을 남긴 셰익스피어처럼, 단편소설과 희곡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불세출의 명작을 남겼다. 그의 희곡은 현재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고전이자 스테디셀러다.
LG아트센터가 직접 제작을 맡은 ‘바냐 삼촌’은 현재 한국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인 손상규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그 자신이 뛰어난 배우이기도 한 손상규는 이번 무대를 체호프 생존 당시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초기 연극과 상당히 흡사하게 연출했다. 당시 공연의 특징은 모든 등장인물이 평등하게 집단 주인공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번 무대 역시 특정 배우만 부각하기보다, 인물 전체의 호흡과 균형을 섬세하게 조율한다. 무대는 자주 바뀌지 않지만, 의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동선과 배치가 상당히 영리하다. 러시아 회화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무대 역시 깊은 잔상을 남긴다.
각 세대를 상징하는 배역들은 각기 자신들이 겪는 삶을 아주 구체적인 대사로 연기한다. 무엇보다도 안톤 체호프 희곡은 인물들에게 전반적으로 희극적 톤이 깔려있는데, 손상규는 한국적 현실에 기반한 대사를 통해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그래서 130년 전 작품임에도 객석에서는 폭소가 끊이지 않는다.

이서진과 고아성의 연기도 더없이 훌륭하지만, 이번 연극에서 가장 매혹적인 연기는 의사 아스트로프를 맡은 양종욱이 보여준다. 그는 바냐와 어울릴 땐 한없이 유쾌하고, 엘레나를 유혹할 땐 위험할 정도로 격정적이며, 소냐의 마음을 외면할 땐 잔인할 만큼 무심하다. 아스트로프는 결국 욕망과 허무를 동시에 끌어안고 사는 현대인의 얼굴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입체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시공간의 한계가 있는 연극에선 시시때때로 변하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구현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양종욱은 섬세한 완급 조절로 장면마다 달라지는 인물에게 현실감을 부여한다.
어느 순간 관객들은 그가 왜 저토록 흔들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순간 객석에는 묘한 슬픔과 웃음이 동시에 번진다. 관객들은 웃고 있지만, 어느 순간 눈가가 젖어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이 평생에 걸쳐 느끼는 후회와 욕망, 체념과 위로. 어쩌면 그것이 130년 전 안톤 체호프가 이 희곡을 통해 보여주기를 갈망했던 인간사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후회하는 중년 바냐, 견디는 청춘 소냐, 욕망과 허무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스트로프. 모든 등장인물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다.
체호프 희곡을 끝내 살아남게 만드는 힘은 결국 웃기면서도 슬픈, 이른바 ‘웃픈’ 정서다. 연출자 손상규와 배우 모두가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최효안 예술 커뮤니케이터·가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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