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마지막 걸작…‘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새 번역 출간
삶·죽음 넘나든 릴케 시정신 한국어로 되살려

인간 실존의 깊은 심연과 근원적 고독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20세기 최고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의 사후 100주기를 맞이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영혼의 지독한 고통 속에서 피워 낸 만년의 위대한 걸작이 마침내 새로운 번역과 정교한 만듦새로 국내 독자들을 찾았다. 민음사가 반세기 역사의 세계시인선 시리즈로 야심 차게 출간한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김재혁 옮김)'는 고독과 방랑으로 점철되었던 릴케 문학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대작이다.
이 연작시집은 릴케가 생애 마지막 5년의 대부분을 보냈던 스위스 시에르의 뮈조성에서 폭풍처럼 불어닥친 예술적 영감에 힘입어 단 20여 일 만에 기적적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평생을 뒤흔든 실존적 고뇌와 훗날 그의 생을 마감하게 만든 백혈병이라는 육체적 한계 속에서 쓰인 이 책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두이노의 비가'와 함께 서정시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총 55편(1부 26편, 2부 29편)의 소네트로 일관되게 구성된 이 시집에서 릴케가 집요하게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삶과 죽음의 공동관계'다. 시인은 삶과 죽음을 단절되거나 대립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순환적 통일체이자 온전함(Whole)으로 받아들인다. 가령 1부 열세 번째 소네트에서 잘 익은 과일을 입안에 넣고 맛보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지상의 삶을 이어갈 에너지를 얻고 과일은 존재의 죽음을 맞이하듯 삶과 죽음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죽음의 영역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상 삶의 진정한 의미와 전일적인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시인의 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나아가 릴케는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시적으로 재해석하며 시인의 사명과 예술적 변용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모두에 발을 딛고 있는 오르페우스는 릴케가 꿈꾼 시인의 모범이자 이상향이다. 죽음마저 삼키지 못한 그의 신성한 노래는, 지상의 덧없고 무상한 존재들을 찬미하여 마침내 영원성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의 소명을 대변한다. 고통스러운 실존을 단순한 비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찬미의 공간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예술의 위대한 힘을 증명해 낸 셈이다.
이번 번역은 국내 릴케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독문학자 김재혁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맡아 신뢰도를 더했다.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소네트 고유의 정교한 규칙과 아름다운 음악성을 한국어 리듬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책 뒤편에 수록된 거의 매년의 행적을 촘촘하게 담아낸 상세한 작가 연보는, 고독한 방랑자였던 시인의 삶과 시정신의 궤적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맛이 쓰다면, 너 자신이 포도주가 되어라(2부 29번째 소네트)"라는 시인의 장엄한 절창처럼, 이 시집은 삶의 필연적인 고통과 허무를 회피하지 않고 의연하게 끌어안으려는 실존적 결단을 보여준다. 100년이라는 기나긴 시공간의 강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당도한 릴케의 위대한 유산은, 고독과 불안이 일상이 된 오늘날 현대인들의 메마르고 상처 입은 영혼에 깊은 위안과 구원의 가능성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