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패권 경쟁 무대 넓어진다…韓, 국제기구와 '글로벌 허브' 구축
(지디넷코리아=장유미 기자)정부가 유엔 산하 국제기구, 다자개발은행과 손잡고 한국에 '글로벌 인공지능(AI) 허브'를 조성한다. 기후위기, 보건, 식량, 난민 등 국제 현안에 AI를 적용하는 협력 플랫폼으로 키워 AI 외교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김민석 국무총리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재정경제부, 외교부 등 관계부처는 21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에서 글로벌 AI 허브 비전 선포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이주기구(IOM),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유엔개발계획(UNDP), 유엔환경계획(UNEP), 유엔난민기구(UNHCR), 유엔아동기금(UNICEF), 세계식량계획(WFP), 세계보건기구(WHO) 등 9개 국제기구가 참여했다.
세계은행(WB), 아시아개발은행(ADB), 미주개발은행(IDB),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중미경제통합은행(CABEI) 등 5개 다자개발은행도 이번에 함께했다. 정부는 이들과 허브를 중심으로 범지구적 AI 협력·연계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번 선포식을 계기로 한국을 AI 기반 글로벌 문제 해결의 거점으로 키우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다. 유엔 산하 주요 국제기구와 다자개발은행(MDB)이 참여하는 협력 체계를 통해 AI 정책·표준, 데이터·모델 공유, 실증 사업을 한데 묶는 국제 플랫폼을 조성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AI 허브는 '모두를 위한 AI, 글로벌 과제 해결을 위한 AI'를 비전으로 한다. 기후 변화, 전염병, 식량 자원, 난민, 노동, 보편적 연결성 등 단일 국가나 기구만으로 풀기 어려운 복합 위기에 AI를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국제사회 대응이 기관별·국가별로 나뉘면서 기술과 인프라가 파편화됐다는 문제의식도 반영됐다.
허브는 크게 3개 축으로 운영된다. 먼저 정책·표준 영역에서 개발도상국의 AI 도입을 지원하고 AI 기술 표준과 지침 수립을 돕는다. 공통 협력 기반 영역에서는 데이터, 모델, 실증 사례를 기관과 국가 간에 공유하는 체계를 마련한다. 실증 영역에서는 도구, 모델, 솔루션을 개발해 실제 활용 사례를 도출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번 구상은 한국의 AI 전략이 산업 육성 단계를 넘어 'AI 외교'와 '디지털 공적개발원조(ODA)'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AI 경쟁은 주로 초거대 모델, 반도체, 클라우드 인프라, 데이터센터 투자 등 기술·산업 패권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글로벌 AI 허브는 여기에 국제기구 협력, 개도국 지원, 공공문제 해결, AI 안전·표준 논의를 결합한 형태다. 이는 한국이 단순 기술 공급국을 넘어 AI 활용 규범과 국제 협력 구조를 설계하는 국가로 올라서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특히 개발도상국 대상 AI 지원은 향후 시장 확장과도 맞닿아 있다. 보건, 기후, 식량, 이주, 교육, 행정 등 공공 분야에서 AI 활용 모델이 만들어지면 관련 솔루션, 클라우드, 데이터 인프라, 교육·컨설팅 수요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기업과 연구기관 입장에서는 국제기구가 발굴한 현장 수요를 기반으로 기술을 실증하고, 이를 글로벌 사우스 시장으로 확산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는 셈이다.
정부가 디지털정부 경험을 전면에 내세운 점도 주목된다. 한국은 전자정부, 공공 데이터, 행정 시스템 디지털화 경험을 축적해 왔다. 여기에 AI 모델과 인프라를 결합하면 개발도상국의 공공 시스템 전환을 지원하는 패키지형 협력 모델을 만들 수 있다. 단순 원조가 아니라 정책 자문, 기술 지원, 교육·훈련, 실증 사업을 묶은 디지털 전환 수출 모델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다자개발은행과의 연계는 실행력을 높이는 장치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아시아개발은행, 유럽부흥개발은행, 중미경제통합은행이 향후 한국 내 설립할 AI 특화센터와 글로벌 AI 허브 간 연계 방안을 발표했다. 세계은행 AI·디지털 지식센터는 지난해 12월 인천 송도에 문을 열고 운영 중이다.
이는 국제기구가 문제와 수요를 발굴하고 다자개발은행이 재원과 개발사업 확산을 뒷받침하며 한국이 AI 기술·인프라·운영 경험을 제공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허브는 단순 선언형 협력체를 넘어 AI 개발사업의 기획, 실증, 금융 지원, 현지 확산까지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다.
AI 국제규범 논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공동성명에는 책임 있고 인간 중심적인 AI, 인간의 감독, 권리 기반 설계, 투명성, 상호운용성, 개방성, 데이터 보호와 개인정보보호, 정보보안, 위험 평가와 완화 등 원칙이 담겼다. 이는 글로벌 AI 허브가 단순 기술 활용센터가 아니라 공공부문 AI 활용의 신뢰성과 안전성을 함께 다루는 거버넌스 장치로 설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허브가 실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후속 실행 계획이 관건이다. 공동성명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협약이 아닌 만큼, 각 기관의 내부 절차와 규정에 따라 후속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 국제기구별 업무 범위와 데이터 규정, 조달 절차, 지식재산권, 개인정보보호 기준이 다른 만큼 실제 프로젝트로 연결되기까지 조율 과정도 필요하다. 민간 기업과 연구기관 참여가 확대될 경우 공공성, 이해충돌, 데이터 보안 문제도 세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업계에선 이번 글로벌 AI 허브가 한국 AI 전략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AI 산업이 자체 모델 개발과 인프라 확보에 집중해 왔다면, 앞으로는 국제기구·개발은행·공공 프로젝트를 연결하는 생태계형 전략이 중요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기술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를 넘어 어디에 어떻게 적용하고 어떤 국제 신뢰 구조 안에서 확산하느냐가 이젠 경쟁력이 되는 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참여 기관들은 실무그룹을 통해 단계별 실행 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다. 공동성명에 따르면 올해 초기 준비 작업을 진행하고 이후 본격 운영 역량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 정부 관계부처와 참여 국제기구, 다자개발은행은 허브의 성공적 안착을 위해 상시 소통 채널을 가동하고 세부 운영 구조와 실행 과제를 구체화할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AI 경쟁은 이제 모델과 인프라 확보를 넘어 국제기구, 개발은행, 공공 프로젝트를 누가 먼저 연결하느냐의 싸움으로 확장되고 있다"며 "한국이 글로벌 AI 허브를 통해 개도국 수요와 국제규범 논의에 깊숙이 들어간다면 국내 AI 기업과 연구기관에도 새로운 실증·확산 기회가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장유미 기자(sweet@zd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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