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보그 여인의 눈동자를 자세히 본 적 있나요

2026. 5. 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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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작가의 이름이 '썸머'입니다.

본명이냐고요? 아닙니다.

본인이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여름을 정말 좋아해서요.

그런데 이 단순한 작명 하나에, 의외로 그가 평생 그려온 것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그가 그리는 여성들의 눈에도 비밀이 하나 있는데, 알아챈 순간 작품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름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건네는 건 뜨거움이 아니라 잠시 멈춤이었습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그 멈춤의 자리에서 '작가 썸머'를 만났습니다.

■ 작가님의 이름 '썸머'를 처음 본 순간, 어느 7월의 햇살이 떠올랐습니다. 수많은 단어 중 '여름'을 작가의 이름으로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woman lying down, 91.0_91.0cm, 2026, Acrylic on canvas

'썸머'라는 이름은 사실 굉장히 단순하게 지은 이름이에요. 저는 말 그대로 여름을 정말 사랑하거든요. 여름의 뜨거운 햇살과 강렬한 기운이 저를 살아있게 만든다고 느껴요.

사실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작가 썸머'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순간이, 어떻게 보면 제 작업의 방향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했어요.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직접 붙인 이름으로 저를 알리고 싶었거든요. 당시에는 대부분 조부모님이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문화가 더 익숙했잖아요.

제 작업이 늘 당당한 여성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그런 작은 선택에서도 '내가 나를 정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이름 자체는 어렵거나 거창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계절, 여름. 그래서 아주 심플하게 '썸머'가 되었습니다.

■ 이름 하나에도 '내가 나를 정의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겼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그렇게 지은 이름으로 그린 화면 앞에 서면, 이번엔 색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한여름 과일의 단면 같기도, 노을이 한참 머문 자리 같기도 한 그 색들 말이지요. 요즘 가장 마음이 머무는 색 하나를 꼽는다면요?

제가 유독 좋아하는 색은 원래 빨간색이에요. 당당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는 색이라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여린 노란색에 자꾸 마음이 머물러요.

보고 있으면 괜히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져요. 봄이 와서 그런지 길가의 개나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빨간색이 강렬하게 나아가는 에너지라면, 노란색은 여린 듯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강한 색 같다고요.

마치 '나 여기 있어. 오늘도 살아가보자.' 하고 조용히 말을 거는 느낌이랄까요. 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작디작은 개나리 꽃의 기운 같기도 해요. 예전에도 삶이 쉽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더 팍팍해졌잖아요. 그래서인지 저는 그 노란색이,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처럼 느껴져요.

■ 노란색이 건네는 위로라는 표현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색에 한참 머물다 시선을 옮기면, 이번엔 인물의 눈에 닿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는 걸 알아채고 한참을 멈춰 서 있었습니다. '쉼표인 눈'이라는 조형언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White house on the field, 90.9_72.7cm, 2026, Acrylic on canvas

제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은 모두 '쉼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시작은 굉장히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했어요.

대학 시절 저는 속눈썹을 아주 바짝 올리고 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 거울 속 제 눈의 형태가 꼭 쉼표처럼 느껴졌어요. 그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고,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적 특징처럼 시작됐지만, 작업을 이어갈수록 저에게 쉼표는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 되었어요. 우리는 늘 무언가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 그림 속 여성들에게만큼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어요. 완결된 마침표보다는, 아직 계속 이어지고 있는 존재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그림 속 눈은 단순한 캐릭터 표현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감정과 시선을 담고 있는 하나의 조형 언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쉼표는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작은 신호일지도 모르겠네요.

■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신호라니, 그 자리에는 어쩐지 '여백'이 함께 머무는 듯합니다. 작가님 작업의 또 다른 키워드가 '자유'라고 알고 있는데, 이 두 단어가 어딘가 닿아 있는 것도 같고요. 최근에 '아, 이게 자유구나' 싶어 캔버스에 옮긴 한 장면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A lavender field, 90.9_72.7cm, 2026, Acrylic on canvas

제 작업에서 자주 이야기하는 '자유'는 거창하거나 대단한 장면에만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최근에는 아주 조용하고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자유를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누워 있는 여성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긴 적이 있어요. 어디론가 달려가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 순간이요. 예전에는 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 같았는데, 요즘은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있는 상태 자체가 자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쉼표라는 형태를 계속 그리는 이유도 어쩌면 그 마음과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잠시 멈춰 있는 시간, 비어 있는 여백, 조용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순간들. 저는 그런 장면들 안에도 충분히 아름답고 단단한 자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 그런 색과 형과 마음이 켜켜이 쌓인 작품들 가운데, 독자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한 점을 꼽는다면요. '대표작'이 아니라 '입구가 되어주는 작품'이라는 의미에서요.

Vintage vogue series, 90.9*72.7cm, 2025, Acrylic on canvas

아마 제 작업의 입구가 되어줄 작품으로는 '보그 시리즈'를 가장 먼저 이야기할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처음에는 화려한 색감이나 패션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작품을 보시는데, 사실 저는 그 안에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거든요.

저에게 보그 시리즈는 단순히 옛 잡지의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60~80년대 여성들이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시대 안에서 자기만의 태도와 자유를 만들어가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시대 여성들이 가진 당당함과 자유로운 에너지를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꺼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시리즈에는 제가 계속 이야기해온 시선들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습니다. 여성, 자유, 자기다움, 그리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요.

아마 처음 제 작업을 보는 분들도 보그 시리즈를 통해 '아, 이 작가는 이런 마음으로 여성을 그리고 있구나'를 가장 직관적으로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작가의 시선이 그렇게 한 작품 안에 모이는군요. 분위기를 조금 바꿔서, 짓궂은 질문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만약 1년의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썸머'라는 이름을 잠시 벗어두고 무엇을 해보고 싶으세요?

To be her, 116.8_91.0cm, 2026, Acrylic on canvas

만약 1년의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저는 제 딸과 단둘이 긴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요. 어디를 꼭 가야 한다기보다, 천천히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행이요.

예전에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간절했던 적도 있었어요. 작업을 하면서도 늘 '나'를 찾고 싶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지금은 함께 걷고, 밥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 안에서도 아주 큰 행복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저는 엄마에게 많은 영감을 받으며 자랐고, 이제는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여성의 삶이라는 게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를 지나 이어지는 감정과 기억의 흐름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아마 그 여행 속에서도 저는 결국 또 새로운 여성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 결국 안식년에도 또 새로운 여성을 만나게 되시는군요. 긴 인터뷰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따라와 주신 아트홀릭 독자분들께, 작가님이 직접 건네고 싶은 한마디를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제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늘 여성들의 얼굴을 그리지만, 사실 그 안에는 거창한 메시지보다도 '당신 그대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을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 느려도,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요.

제 그림이 누군가에게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표 같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다운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를, 조용히 응원하고 싶습니다.

(사진 제공: 작가 썸머)

정승조 아나운서는 CJB청주방송에서 활동하며 문화예술의 가치를 전하는 방송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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