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小滿), 푸른 생명력이 곳곳마다 차오르네

이휘빈 기자 2026. 5.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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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길, 절기 이야기] (8) 소만
보리 익어가고 대나무 시드는 시기
춘궁기 ‘보릿고개’ 현대에야 극복
한중일 삼국, 누에치기 중히 여겨
제철 음식으로 나물과 죽순 꼽아
2026년 소만은 5월21일이다. 온 산과 들이 짙은 초록으로 물드는 계절이다.

소만(小滿)은 24절기 중 여덟번째 절기다. 양력 5월21일 무렵, 태양의 황경이 60도에 이를 때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며, 한자로 풀면 ‘조금 찼다’는 뜻이다.

봄인데 가을 추? 낯선 이름 유래는
소만을 부르는 다른 표현은 맥추(麥秋)와 죽추(竹秋)다. 이 시기 다른 식물들이 푸르게 살아날 때 보리와 대나무는 오히려 누렇게 변하기 때문이다. 

보리는 노랗게 변하며 익는다지만, 대나무는 왜 노랗게 변할까. 이는 새싹(죽순)을 키워내기 위해 어미 대나무가 가진 영양분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여름이 가까워졌음에도 대나무에는 가을을 맞았다 하여 ‘죽추’라는 표현을 썼다.

보리 자라는 동안 높아지는 이 고개
2013년 5월21일 소만의 보리밭. 농민신문DB
온 산과 들이 짙은 초록으로 물드는 풍경이지만 슬픈 시기이기도 했다. 한자로는 맥령(麥嶺), 우리말로는 ‘보릿고개’다.

지난해 가을에 거둔 쌀은 바닥나고, 올해 심은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의 춘궁기를 이르는 말이다. 소만은 그 한복판에 든다. 조선시대에는 보릿고개에 대비해 관아에서 봄에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 때 되받는 환곡(還穀) 제도를 운영했다. 그럼에도 보릿고개 넘기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학자인 정약용은 굶주린 백성들의 모습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쓴 ‘장기농가’ 첫줄에는 “보릿고개 험하기가 (중국의) 태항산 같다”고 쓰여 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보릿고개는 1960년대 벼 품종 개량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 수확량이 늘어난 뒤에야 사라졌다.

소만은 있는데 왜 ‘대만’은 없을까
24절기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소서(小暑)에는 대서(大暑), 소설(小雪)에는 대설(大雪), 소한(小寒)에는 대한(大寒)이 짝지어 있다. 그런데 소만(小滿)에만 유독 대만(大滿)이라는 절기가 없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선조들은 가득 차면 손실을 부르고 조금 찬 것이 오히려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했는데,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뒤집힌다는 이치다.

농사에서 이 철학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홍수가 될 수 있고, 더위가 과하면 가뭄이 든다. 극단을 피하고 점진적인 충만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만’이라는 이름만 절기로 남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이 중히 여긴 ‘누에치기’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은 소만 무렵 누에치기에 집중했다. 클립아트코리아
소만 무렵 동아시아 삼국은 공통으로 누에치기에 바빴다. 조선의 국가 정책 기조는 ‘권농상(勸農桑)’, 즉 농사와 양잠을 나란히 세운 것이었다. 음력 3월에는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직접 뽕잎을 따는 친잠례(親蠶禮)를 국가 의례로 거행했다. 종묘·사직에 올리는 대사(大祀) 이어 중사(中祀)로 규정된 의례였다. 

그렇게 시작된 봄 양잠이 음력 4월 소만 무렵에 절정을 맞이했다. 농가월령가 4월령은 이 계절을 이렇게 기록했다. “농사도 한창이요 누에치기 바쁘구나. 남녀노소 일이 바빠 집에 있을 틈이 없어,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중국에서는 소만을 누에신(蠶神)의 탄생일로 삼았다. 장쑤·저장 일대에서는 소만 절기에 기잠절(祈蠶節)을 지내며 고치의 풍년을 빌었다. 중국의 세시풍속을 담은 청가록(淸嘉錄)은 “소만이 오면 아낙들이 누에고치를 삶고 밤낮으로 실을 켠다”고 했다.

일본은 한 절기에서 다음 절기까지의 15일을 5일 단위로 나눈 삼후(三候)에서 소만의 초후(初候)를 ‘잠기식상(蠶起食桑)’, 곧 ‘누에가 일어나 뽕잎을 먹는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양잠이 국가적으로 중요했기에 군마현과 나가노현에서는 누에를 ‘오카이코사마’라는 경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씀바귀·죽순·냉잇국이 제철음식
씀바귀나물(위쪽부터), 삶은 죽순, 냉잇국. 한국민속대백과사전·게티이미지뱅크
한국도 소만의 삼후 중 초후(初候)를 두고 ‘씀바귀가 대를 올려 뻗어 오른다’고 했다. 여름이 시작되면 몸의 기운이 피부로 집중되면서 위장이 허해지고 입맛이 떨어지는데, 이때 씀바귀의 쓴맛이 위장을 깨우고 입맛을 살린다고 여겼다. 그래서 농가에는 “봄에 씀바귀를 먹으면 한해 여름 내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말도 전해진다.

땅을 뚫고 나오는 죽순도 대표적인 제철 음식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죽순은 맛이 달고 찬 성질을 가지고 있어 갈증을 해소하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효능이 있다.

또 다른 별미로는 냉잇국이 꼽혔다. 냉이는 단백질·칼슘·철분 등이 풍부한 나물로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다. 소만이 이후 꽃이 피면 더 이상 먹기 어려워지므로, 이 시기가 마지막 냉잇국을 즐길 수 있는 때이기도 했다.

◇도움말=‘24절기 이야기’(한호철 지음, 지식과교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세시풍속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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