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모와 공순이 [정동주의 농사와 농촌에 관한 이야기(18)]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 2026. 5. 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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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도시 식모살이 하러 간 여성들
그들이 겪은 삶, 농촌문화 의식 뒤흔들어

농촌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딸자식들을 천덕꾸러기라 여겼다. 가난과 배고픔의 시대를 건너면서 사람들이 가장 좋게 여기는 것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제 입에 들어가는 밥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내아이라면 남의 집 새끼 머슴으로 들어가서 제 밥을 해결하고, 일 년에 곡식 몇 말이라도 받아서 살림에 보탤 수 있었지만, 딸들은 그저 밥이나 축내는 밉상으로 여겼다. 딸들에 대한 그 같은 인식은 벌써 수백 년 전부터 있어왔다. 딸들이 아무것도 살림에 보탬이 못 되는 것은 그들이 원초적으로 무능력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극단적으로 차별하는 유교이념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폭력이었다.

더구나 1948년 대한민국 헌법과 이를 바탕한 교육 제도에서 딸들에게도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사내아이들과 똑같이 교육받을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음에도 1950년대를 지나는 10년 동안 딸들이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딸자식을 둔 부모들과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남녀를 차별하는 오래된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일수록 자식이 많았고, 그 가운데 딸들은 어딜 가나 천덕꾸러기였다.

딸들은 한국의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편안하게 서 있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극심한 차별과 슬픈 시대에 그 딸들이 밥과 잠자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 도회자 잘 사는 사람 집에 가서 그 집의 온갖 궂은일과 부엌살림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 일자리를 '식모살이'라 불렀다.

초기에는 딸들의 이런저런 친인척 되는 사람들이 식모살이할 집을 구해주었다. 도회지 사람의 부탁으로 시작된 적도 있고, 시골의 친인척 되는 딸들의 어머니나 가까운 사람들의 부탁을 받아서 이뤄지기도 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딸아이들을 들여보내도 이런저런 염려를 하지 않고, 주인집 사람들을 믿었다. 식모로 들어간 딸들은 몇 달만 지나서 몰라볼 만큼 얼굴이 밝아지고 행복한 모습이었다. 밥과 잠자리 외에 약간의 수고비도 받았다. 딸아이들 대부분은 자기 이름자는 쓸 줄 알았고, 숫자와 간단한 계산도 할 수 있어서, 얼마 안 지나서부터 주인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다녀올 수 있게 될 만큼 적응이 빨랐다.

이 소문이 시골 고향 마을에 알려지자 딸들은 너도나도 '식모'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세월이 몇 년 안 지나서부터 식모살이는 시골의 천덕꾸러기 딸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그리하여, 직업소개소도 아니면서 시골의 딸들을 도회지 잘사는 집의 식모자리를 알선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1950년대 후반 무렵에는 '식모'가 농촌 젊은 여성들에게 괜찮은 일자리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때부터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문화가 그들의 농촌문화 의식을 뒤흔들었다. 가장 빠르고 큰 힘을 지닌 것은 전깃불과 '트랜지스터 라듸오', 무연탄과 나일론 옷이었다. 도회지 잘 사는 집은 전깃불이 일상화되었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와 뉴스와 유행가는 신세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연탄불은 난방과 부엌살림을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어갔다. 특히 '나이롱'(나일론)으로 마든 온갖 색깔과 무늬로 장식된 옷은 너무나 신기했다.

이런 변화들은 딸들의 의식 속으로 빠르게 흘러들어와서 태어나서 보고 들어온 농촌의 문화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정동주 시인·동다헌 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