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도에 유배된 동국진체 완성자 원교 이광사


- 추사, 원교의 동국진체를 인정하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추사가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친구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들른다. 그때 추사의 눈에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대웅보전’ 네 글자가 보인다. 원교보다 1세기 후대의 인물인 추사는 초의에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런 글씨를 걸고 있단 말인가? 당장 떼시게”라고 말한 뒤 예서체로 쓴 자신의 글씨를 걸게 한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를 완성한 이광사에 대해 추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도 덤으로 써준다. 오늘 대흥사에 추사의 ‘무량수각’과 원교의 ‘대웅보전’이 함께 남아 있는 이유다.
유배가 풀려 8년 만에 대흥사를 다시 찾은 추사는 초의에게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찾아 걸도록 했다. 중국 중심의 전통 서법을 추구했던 추사도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
이광사는 김정희의 마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부족해 문기(文氣)가 죽은 사람의 글씨는 재주와 필력이 있어도 한낱 글씨장이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가 정립한 서법을 이광사가 완성한 조선 고유의 서체다. 서예 분야에서 동국진체가 출현했던 것은 ‘진경시대’(眞景時代)라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성리학이 고유의 이념으로 뿌리내렸고,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뭉쳐져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 중화주의를 표방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오랑캐(청)에 대한 조선의 자존감과 우수성은 글씨에서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로 발현됐다.
옥동 이서에 의해 시작된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를 거쳐 소론계 학자 백하 윤순에게 전해졌고, 원교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다. 원교는 중국의 왕희지체를 본받으면서도 우리 고유의 생명력을 글씨에 담아낸다. 윤순은 이광사의 스승이다.
- 완도 신지도에 유배되다
원교 이광사가 완도 신지도에 유배와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국진체가 오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도 한몫했다고 본다. 영·정조시대 역사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저자 이긍익이 그의 아들이라고 하면, 아마 놀랄지 모른다.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 역시 벼슬길을 단념하고 빈곤 속에 살았는데, 그는 우리나라 야사를 모두 모은 ‘연려실기술’을 집필한다. ‘연려실’은 부친 이광사가 손수 이름 지은 아들의 서재 이름으로, 한나라 유황이 글을 정리할 때 신선이 나타나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빛을 밝혀줬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 그는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정종의 피가 흐른 왕족이었으니 한때는 왕족으로 위세를 누리기도 했다. 부친 이진검은 과거급제 후 평안도 관찰사와 예조판서를 지낸다. 그러나 왕족으로서의 위세는 거기까지였다.
이광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권력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분이 경종이다. 그런데 경종은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들마저 없었으므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자로 옹립한다. 이후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까지 강행하자, 소론이 역공을 펴 노론의 4대신을 4흉으로 몰아붙이는 상소를 올려 권력을 빼앗는다.
이광사의 큰아버지 이진유가 상소문을 올릴 때 연명자가 됐고,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의 요직을 지낸다. 이 일로 이진유는 노론 세력과 불천지 원수가 된다.
경종이 세상을 뜨고 연잉군 즉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소론이 몰락하자, 이광사 집안에 회오리가 몰아친다. 큰아버지 이진유는 귀양길을 전전하다 중앙에 압송돼 문초를 받던 중 옥사했고, 부친 이진검도 1725년 강진에 유배 후 죽었는데, 이때 이광사의 나이 17살이었다.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던 이광사는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이광사가 스승 정제두가 있는 강화도에 은둔하면서 성리학에 저항적인 신학문인 양명학을 받아들였고, 글씨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광사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55년, 나주에서 30여 년간 귀양살이하던 소론 윤지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주 금성관 입구 망화루에 괘서(掛書)를 붙여 영조를 비난하는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다.
소론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윤지를 비롯한 사건 주동자들은 영조의 친국 이후 처형된다. 이때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곤 했던 이광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다. 부인 유씨는 이광사가 의금부에 하옥된 후 참형됐다는 소문을 듣고 목을 매 자결한다. 이광사의 나이 51세였다.
18세기 인물인 이규상은 ‘동시대의 빼어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인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을 남긴다. 이규상은 “의금부로 끌려온 이광사가 하늘을 향해 ‘내게 뛰어난 글씨 솜씨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통곡하자, 이를 불쌍히 여긴 영조가 살려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이광사의 유배 생활은 1777년(정조 1) 73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3년이나 지속됐다.

- 고단함을 품은 초상화
조선 후기 풍속 화가로 가장 유명한 분은 신윤복이다. 신윤복의 부친 신한평이 원교 이광사를 그린 초상화가 남아 있다. 초상화가 보물 제1486호로 지정됐으니 보통 수작이 아니다. 초상화 오른쪽에 쓰여 있는 작자 미상의 제(題)를 보면 제작 연도가 영조 50년(1774)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이광사의 나이 70세로, 사망 3년 전이다.
신한평이 이광사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초상화를 그리기 1년 전인 1773년(영조 49), 영조의 어진을 모사할 때 심부름하던 화공으로 참여했고, 그 공로로 신지도 만호에 제수됐기 때문이다. 이때 신지도에 내려와 이광사를 만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초상으로는 매우 드문 예다.

-전라도 땅에 남겨진 글씨들
신지도에 이배되자, 그의 글씨를 알아본 많은 스님이 신지도를 찾는다. 오늘 전라도 일대의 사찰 현판에 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는 이유다.
해남 대흥사에는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면서 촌스럽다고 깎아내렸던 ‘대웅보전’을 비롯해 ‘침계루’, ‘천불전’, ‘해탈문’이 모두 이광사의 글씨다. 마치 이광사의 서체 전시장 같다. 대웅보전 바로 옆 백설당의 현판 ‘무량수각’은 추사의 글씨로, 최고 명필의 글씨가 나란히 걸려 있어 흥미롭다.

신지도 금곡마을은 그가 15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당시 살았던 집은 복원돼 단장돼 있다. 이곳에서 그는 보물로 지정된 서예 이론서인 서결(書訣)을 완성한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은 대흥사 대웅보전에 걸린 이광사의 글씨를 “획이 삐짝 마르고 기교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화강암의 골기가 느껴진 황토색 짙은 작품”이라 평했다. 이광사의 글씨에 대한 평은 또 있다. 서예가인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원교의 글씨는 신지도 앞 바다의 잔잔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거친 파도를 닮아 노기(怒氣)를 띠고 있다”고 평했다.
원교 이광사는 18세기 가장 뛰어난 서가(書家)이자 서예 이론가였다. 그런 인물을 추사 김정희는 ‘붓 잡을 줄도, 먹 쓸 줄도 모르는 형편없는 서예가’로 폄하했다.

23년의 고단한 유배 생활과 추사에게 혹평받고 있는 원고 이광사에게 다산 정약용의 평가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싶다.
Copyright © 광주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