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빗속 손모내기 속 되살아난 청송 농촌 공동체

서충환 기자 2026. 5. 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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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양숙리 들녘서 풍년기원제·통일쌀 모내기 행사 개최
품앗이 사라진 농촌에 협동·나눔 정신 다시 심다
▲ 20일 오전 청송군 부남면 양숙리 들판에서 진행된 '2026년 풍년기원제 및 통일쌀 손모내기 행사' 참석자들이 전통방식으로 모를 심고 있다. 서충환 기자

"줄 넘어갑니다. 줄이요!"

20일 오전 청송군 부남면 양숙리 들녘. 가뭄 끝 단비가 굵은 빗줄기로 논바닥을 두드리는 가운데, 못줄잡이의 외침이 고요한 들판을 갈랐다. 갯벌처럼 질퍽한 논 가장자리에 길게 줄지어 선 농민들과 주민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손에는 연둣빛 어린모가 한 움큼씩 쥐어졌다. 발은 진흙에 빠지고 흙탕물이 튀었지만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기계가 농사를 대신하는 시대, 이날 양숙리에서는 사람 손으로 한 포기씩 심는 전통 손모내기가 되살아났다. 단순한 농사 체험이 아니라, 사라져 가던 농촌 공동체의 숨결이 다시 논 위에 펼쳐지는 현장이었다.

청송군농민회는 이날 양숙리 들녘에서 '2026년 풍년기원제 및 통일쌀 손모내기 행사'를 열고 한 해 풍년 농사를 기원했다. 행사에는 농민회 회원과 주민 등 50여 명이 참여해 전통 농법에 따라 직접 논에 들어가 손모내기를 진행했다.

모내기에 앞서 들녘 한켠에서는 풍년기원제례가 엄숙하게 진행됐다. 제상 앞에 선 주민들은 고개를 숙이며 재해 없는 한 해와 넉넉한 수확을 기원했다. 빗소리만 들리던 들판에는 잠시 경건한 침묵이 흘렀다.

▲ 20일 청송군 부남면에서 열린 '2026년 풍년기원제 및 통일쌀 손모내기 행사'에서 김영동 청송군농민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충환 기자

이후 본격적인 손모내기가 시작됐다. 두 명의 줄잡이가 못줄을 옮기면 참가자들은 줄에 표시된 빨간 간격에 맞춰 모를 심었다. 허리를 굽힌 채 앞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동작처럼 보였지만, 호흡이 어긋나면 줄이 흐트러지고 모 간격도 삐뚤어졌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속도를 맞추고 손발을 맞춰야 하는 고된 협동 작업이었다.

처음 논에 들어선 일부 참가자들은 발을 헛디디거나 모를 거꾸로 심기도 했다. 진흙탕 속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지만, 이내 "한 줄 더 갑시다", "조금만 붙이소"라는 목소리가 논바닥을 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설프던 손놀림은 점차 익숙해졌고, 홍톳빛 빈 논은 초록빛 모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찌고, 이를 논으로 옮긴 뒤 못줄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심는 방식까지 옛 농법이 그대로 재현됐다. 참가자들은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전통 모심기 방식을 몸소 체험하며 농경문화의 의미를 되새겼다.

▲ '2026년 풍년기원제 및 통일쌀 손모내기 행사'가 20일 청송군 부남면 양숙리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 농민들이 전통방식 그대로 손 모내기를 하고 있다. 서충환 기자

모내기를 마친 뒤 논두렁은 또 다른 풍경으로 채워졌다. 주민들은 둘러앉아 막걸리와 과일, 마을에서 준비한 비빔밥으로 새참을 나눴다. 젖은 옷과 흙 묻은 장화 사이로 웃음꽃이 피었고,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주민들은 안부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도시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농촌만의 풍경이었다.

청송군농민회의 손모내기 행사는 지난 2023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농민회 회원들이 전통 농경문화를 지키고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자는 뜻을 모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청송지역을 덮친 초대형 산불로 행사가 열리지 못했지만, 올해 다시 논 위에서 그 맥을 이었다.

김영동 청송군농민회 회장은 "예전처럼 함께 논에 들어가 공동 작업을 하며 농촌의 정을 되살리고 싶었다"며 "가을에는 주민들과 함께 추수감사제도 열고, 수확한 쌀은 청송군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과 나눌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계화가 일상이 된 농촌에서 손모내기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고령화와 일손 부족으로 품앗이 문화는 사라지고, 농사는 점점 개인의 몫이 됐다.

그러나 이날 양숙리 논에서는 달랐다. 줄을 맞추고, 손을 보태고, 일을 마친 뒤 음식을 나누는 모습 속에는 과거 농촌 공동체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청송 들녘을 채운 초록빛 모처럼, 잊혀져 가던 공동체 정신도 이날 다시 논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