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쓴 분단의 파노라마…'진혼의 증언자' 최돈미의 귀향
재미교포 시인․번역가 최돈미 시집 <DMZ 콜로니>
202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 최근 한국어판 출간
사진․증언․그림 등 사료와 시구의 실험적 조합
시대의 그늘을 번역하고 분단 상흔을 기억하다
언니가 동생을 치마 밑에 숨기고 그 위에 앉아서 동생을 살렸다 한다. / 동생은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 엄마 머리카락 한 뭉텅이만 잡았다고. / 불길을 끌 수 없었어. / 아부지가 지글지글 치직치직 탔어. / 동생은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다. / 꿈속에서 나는 엄마 머리카락을 씹고 또 씹었다.
- 시 '고아 김경남(16살)' 중
시인 김혜순의 문명(文名)을 세계에 알린 번역가, 미국 예술계가 주목한 실험 미학의 역사 비평가. 재미교포 시인 최돈미가 모국으로 돌아왔다. 2020년 한국계 시인 최초로 전미도서상 시 부문을 수상한 영문시집 <DMZ 콜로니>의 한국어판이 최근 출간된 것이다. 당시 전미도서재단으로부터 “역사의 희생자인 우리 모두를 증언하고 저항하게 한다”는 호평을 받았던 이 시집은 국내 출간 직후 출판계의 이목을 끌며 한국 시단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DMZ 콜로니>는 단순한 시집의 개념을 넘어 문학과 미술, 비평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미학적 장르를 개척해가는 ‘종합예술 작품집’이라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 즉 전쟁과 분단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의 그늘을 주제로 다루면서 시구(詩句)는 물론 기록·사진·증언 등 다양한 사료(史料)를 활용했다. 생존자의 증언을 재구성해 한 편의 시로 승화시키고, 역사적 장면을 포착한 사진을 바탕으로 비판적 담론을 제시한다. 해외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은 자신의 가족사를 공감의 기틀로 삼아 비전향 장기수의 고통, 산청․함양 학살 사건의 참상, 군사독재 시절의 엄혹함을 감각적으로 복원·증폭시킨다.
시와 기록, 증언의 병치, 산문과 그림, 사진의 조합 등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지는 역사의 상흔은 묵직한 미적 충격으로 다가와 독자의 뇌리에 각인된다. 최돈미의 이 같은 실험적 작업은 과거의 비극을 재현함으로써 역사의 명암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나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문제의식을 촉진한다.
그는 책에서 “역사의 희생자들은 집 안팎에서 영원히 고향을 떠나 망명 상태로 살아간다. 기억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며 “우리는 이방인으로, 번역가로 살아간다. 우리는 몸에 새겨진 모든 것을 다시 쓰는 의미를 잘 안다”고 논한다.

현실 비판에 경도된 소위 리얼리즘 문학의 한계는 복잡다단한 정치·사회적 맥락을 거두절미한 나머지, 역사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최돈미의 시가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미적 경이(驚異)’를 발산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해석과 구호를 앞세우기보다 사실에 입각한 휴머니즘을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절대 보편적 인류애 앞에서는 그 어떤 이념적 대립도 무화(無化)되기 마련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 비탄(悲嘆)의 도가니 속에서는 살벌했던 전쟁의 철기(鐵器)들도 녹아내릴 따름이다. 일찍이 4․19의 시인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며 이렇게 외쳤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방인을 자처하며 모국의 눈물을 지극히 기억하고, 소실돼 가는 시대의 그늘을 번역해 현재와 공명(共鳴)하게 하는 시인 최돈미. ‘역사의 오답’을 재단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정답’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에, 최돈미의 도전적 시작(詩作)은 순수성을 잃지 않고 만국(萬國)의 공감을 사게 된 것이다.
포획, 고문, 학살의 언어는 해독하기 어렵다. 거의 외국어 수준이다. 끔찍한 악몽 같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니까 아주 작은 떨림과 고통도 감지할 수 있다. 어려운 구문! 희미한 점과 선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건 종종 피이고, 눈이고, 심지어 비듬이기도 하다. 어떻게 아느냐고? 이방인들은 다 안다.
- 시 ‘한 나라의 끝’ 중
이산 아픔 딛고 모국 비극 품는 시 쓰기…김혜순 번역으로 세계적 주목
최돈미는 1962년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군사정권 시절, 정치적 박해를 우려한 사진기자 출신 아버지를 따라 1972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1983년 부모님과 남동생은 서독으로, 오빠는 호주로 떠났으며, 언니는 홍콩에 남았다. 미술을 전공한 최돈미는 학위를 마치기 위해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갔고 캘리포니아예술대학에 진학했다.
‘고국에서 살 수 없다’는 마음에 괴로워하던 대학 시절, 그 심정을 시로 써보면 어떻겠냐던 한 교수님의 제안으로 창작 세계에 입문했다. 당시 독재에 맞선 학생시위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과 아픔을 주된 작품 소재로 다루게 됐다. 2010년 시집 <모닝 뉴스는 재밌다>로 데뷔한 이래, 2020년 <DMZ 콜로니> 출간 전후로 2016년 <전쟁 아닌 전쟁>, 2024년 <거울 국가> 등 ‘한국-미국(KOR-US) 3부작’ 시리즈를 완성하며 미국 실험 시단의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21년 영국 왕립 문학협회, 2023년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에 입회하는 등 국제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1998년 김혜순의 시를 읽고 감명받은 최돈미는 2000년대 초쯤 그를 직접 만나면서부터 원작자와 번역가로서 인연을 맺게 된다. 최돈미는 과거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그렇게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시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다. 한국 여성의 고통을 담은 시를 보며 한국에 더 관심이 커졌다”며 “김(혜순) 선생님의 시를 번역하며 제 시가 더 깊어졌다고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민 간 뒤 오랫동안 나의 언어가 점점 사라져서 오랫동안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썼는데 김혜순 선생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 목소리를 찾아 나갔다. 선생님과 함께 수다를 떨며 번역을 해가는 과정에서 내 혀가 떠돌이, 망명자의 혀라는 걸 깨닫게 됐고 그 혀로 글을 쓰게 됐다. 번역은 내가 언어를 되찾는 작업이기 때문에 하늘을 봐도, 새를 봐도,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2022년 9월 24일 서울국제작가축제 김혜순·최돈미 대담 중
이후 최돈미가 번역한 김혜순의 대표작들은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011년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가 미국문학번역가협회 루시엔 스트릭상을, 2019년 <죽음의 자서전>이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을, 2024년 <날개 환상통>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게 됐다. 김혜순은 2019년 그리핀 시 문학상 수상 기념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최돈미와의 번역 작업과 관련해, “그가 제게 가장 많이 물은 질문은 ‘주어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며 “나는 그에게 시를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많이 물었다”고 밝힌 바 있다. 최돈미는 미국 시애틀을 거쳐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으며, 내년쯤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될 예정인 김혜순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번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구원의 불꽃 솟아나는 ‘거울 단어’…제국의 국경 가로지르는 새가 되다
사실 우리는 다 DMZ에서 온 천사들이었다. 우리도 역시 판문점 하늘 아래 함께 어울리고, 웃고, 뛰어놀았다. 잘 들어, 천사들아, 우리는 고아 아닌 고아들. 우리는 둔중한 것 / 제3의 의미 / 언어에서 무의미로 / 영원으로 / 식민지로 / 식민지로 가는 통로다. 후광에서 후광으로, 손에서 손으로, 우리는 손을 흔든다. 안녕. 천사들.
- 시 ‘(새로운) (=) (천사들)’ 중

최돈미는 김혜순의 죽음, 최승자의 공허, 이상의 이상(理想)을 감각적으로 번역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주의적 서정성을 넘어, 다채롭고 자유로운 한국 시학(詩學)에 대한 세계의 공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최돈미의 번역과 시 쓰기는 단지 정격과 파격, 고유성과 전위의 구분에 갇히지 않고 인류 보편의 진실성으로 세계 곳곳의 DMZ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작업이었다.
열전과 냉전 이후로 신제국주의와 식민논리의 암운(暗雲)이 다시금 드리우는 이때, 최돈미의 시세계는 우리 문명의 근원적 뿌리를 더듬어나간다. 마치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인 DMZ, 철조망 너머 그 금단의 구역에서 지긋하게 공생(共生)해 가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넋을 부르고 또 부르며,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의 대립을 망설임 없이 일갈한다.
폭력의 시대를 폭력적 기억으로 다스리기보다, 끝내 인간 세상의 시원(始原)을 되새기게 하고 태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 그것은 바로 해원(解冤)의 길이요, 구원(救援)의 바람이다. 그 길과 바람 위에서 최돈미의 시는 제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새 떼가 되고, 지상의 아귀다툼을 저 멀리 흩트려버리는 천사의 날개가 된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이상의 단편 ‘날개’ 중)
해체이론은 전도와 전치를 수반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적 대립들 속에는 항상 폭력적인 위계가 존재한다. 두 가지 입장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제하고,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대립을 해체하는 첫걸음은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 마단 사럽,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최돈미의 시어와 번역의 어휘들은 ‘거울 단어’로 명명된다. 거울을 통해 보지 않고서는 엇갈린 좌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문장(“?까니입령엄계 금지, 하각 / 하각 ?까니습있 아살 은신당”)이자, 우리의 지나온 길을 거울처럼 비춤으로써 망각 사이에 숨겨진 비극을 현출(顯出)시키는 자성(自省)의 실천이다. ‘반식민주의 양식으로서 번역은 다른 단어들을 만들 수도 있다. 거울 단어는 국경을 따라 나부끼며 종종 바다를 건너, 심지어 은하를 건너서 비행한다.’(시 ‘거울 단어들’ 중) 역사서의 뒷 페이지로 희미해져 가는 고문과 학살, 분단과 독재….
최돈미의 거울 빛을 받으며, 실재계는 언어 권력이 펼쳐놓은 안온한 상징계의 장막을 찢고 튀어나와 독자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분열과 단절의 희생물들이 살아 돌아와 우리 마음속 자기검열의 위계질서를 흔들어 놓는다. 반전(反轉)의 상상력은 반전(反戰)의 미학을 낳고, 비참의 진흙탕 그 한가운데 피어나는 각성의 연꽃…. 최돈미의 시는 우리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관념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동아줄이자, 반성과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처절한 외침의 불꽃이다. 쇠의 시대를 살라 먹는 최돈미의 불꽃으로, 사람들의 내일은 한 걸음씩 더 환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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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민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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