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동아리엔 라면 국물 담긴 코펠과 소주병이 굴러다녔다 [등산시렁]
산에 가서 등산만 하고 오는 건 싫은 남자의 등산 중 딴짓

#3
3월 2일 개강, 학교는 북적였다. 그제야 나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됐지만 새내기가 으레 가져야 할 패기 같은 건 챙길 생각이 없었다. 내 앞으로 낭만적인 대학 생활이 레드카펫처럼 펼쳐질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학과(공대였다)는 의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선택한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학과 동기가 누구인지, 선배가 누구인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무표정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공대 건물로 들어갔다. 첫 수업을 들었다. 교수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하나도 알아먹지 못했다. 동기처럼 보이는 누구와도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강의실 바닥은 차가웠다. 형광등 한 개가 깜빡였다. 나는 강의실에서 오래전부터 자란 나무였다. 혹은 누군가 갖다 놓은 벽돌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생회관으로 갔다. 산악부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산악부'라고 쓰인 문 앞에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을 올려 나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똑." 조용했다. 지난 입학식이 끝난 뒤 찾았다가 아무도 없어 돌아섰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산악부 망했나? 없어졌나?' 그러진 않았을 것이라 여겼다. 왜냐하면 문 아래 틈으로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걸 나는 지난번처럼 똑같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문 뒤에서 인기척이 들였다.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은 긴 얼굴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말했다.
"누구세요?" 나는 대답했다.
"저, 산악부 가입하고 싶은데요?"
긴 얼굴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공손한 말투로 태도로 말했다.
"아,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나는 그가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동아리방은 크지 않았다. 가운데 커다란 책상이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책장이 있었고, 그 옆에 등반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창가에는 침대가 있었고 침대 앞에 컴퓨터와 프린터가 있었다. 컴퓨터는 밤새 켜져있었던 듯 "웅~웅~" 소리를 냈다.
현관문이 달린 벽에는 짙은 갈색의 인공암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공암벽에는 작은 홀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나무 판에는 금색 스프레이로 커다랗게 낙서가 되어 있었다. '소주 맥주 막걸리 男 女'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저게 무슨 뜻일까?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를 섞어 먹은 남자가 여자로 변신했다는 의미인가?' 으스스한 공기 때문에 몸이 떨렸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모든 것을 추측하는 사이 긴 얼굴의 남자는 연신 마른 세수를 하면서 내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는 맨발이었고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목이 다 늘어난 베이지색 티셔츠를 입었고, 남색 바지는 헐렁함이 극에 달해 나풀댔다. 수 많은 먼지가 달라붙어 몇 년 동안 짓이겨지고 마모된 모양인지 바지는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의 뒤쪽엔 침대가 있었다. 베개 색깔이 누랬다. 꽃무늬가 들어간 이불도 비슷한 색깔이었다. 그는 자다가 허겁지겁 나온 모양이었다.
그의 발 뒤쪽, 그러니까 침대 아래에는 산에서 쓰는 코펠 몇 개와 버너가 있었고 그 안엔 라면 국물 같은 게 고여 있었다. 주변에 소주병 몇 개도 눈에 띄었다. 마른 세수를 마친 긴 얼굴의 남자는 드디어 나에게 물었다.
"여기 어떻게 알고 왔나요?" 나는 아까와 똑같이 대답했다.
"산악부 가입하려고…" 그가 대답했다.
"아이고, 정신이 없네, 엊그제 산에 갔다와서."

그가 또 마른 세수를 하고 머리를 수없이 매만지는 동안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때 긴 얼굴의 남자 뒤에 있던 침대가 움직였다. 거기서 사람 얼굴 하나가 또 불쑥 나왔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입 옆에 검은 점이 있었다. 그도 긴 얼굴의 남자처럼 비틀대면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가 베고 있던 베개 역시 누랬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긴 얼굴의 남자에게 꾸짖듯 말했다.
"야, 정신차려. 손님 왔잖아!"
그러면서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나를 책상으로 이끌었다. 씨익 웃는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자, 여기 입회원서부터 쓰시고."
나는 그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봤다. 이름, 나이, 학과, 학번, 전화번호 등을 적는 칸이 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볼펜을 들고 차례대로 이름과 나이, 학과와 학번 등을 적었다. 그리고 시계를 들여다봤다. 다음 수업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비틀대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 곧 수업이 시작돼서, 끝나고 다시 올게요."
마른 세수를 하던 남자가 손짓을 멈추고 대답했다.
"네, 네. 그러세요. 얼른 다녀오세요. 꼭 다시 오세요!"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산악부' 방에서 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쾅"하고 닫혔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보통 어른 같았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전날 늦게까지 회식을 한 일에 찌든 회사원 같았다. 고등학교 때 봤던 산악부 형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것이 대학교 산악부인가?' 나는 의아했다.
어둑했던 산악부 동아리방 풍경에 비해 학생회관 바깥은 매우 활기찼다. 교내 곳곳에 설치된 게시판에는 손으로 쓰거나 그린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A3사이즈의 다양한 색상으로 이뤄진 포스터에는 여러 동아리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산악부원을 모집한다는 포스터는 어디에도 없었다. 파란 잔디가 깔린 광장에는 앉아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이 가득했다.

이른바 '밀레니엄' 시대였다. 작년 12월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Y2K(Year 2000)"를 외치면서 연도가 1999에서 2000으로 넘어가면 모든 컴퓨터가 에러를 일으켜 금융 시스템이 작동을 멈춘다거나, 어떤 교회는 곧 휴거가 닥칠 거라면서 종말이 올 거라고 떠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지난 것 뿐인데 교정은 그저 봄이었다. 어둑했던 분위기는 걷히고 곳곳에서 나를 비롯한 신입생을 가리키는 듯한 용어 'N세대'라는 단어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외 테크노, 닷컴 등등 컴퓨터 혹은 디지털 관련 용어들이 세기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비빔밥처럼 모든 게 뒤섞인 듯한 공기 속에서 이날 산악부 동아리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았다. 아무 희망이 없어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아 무표정한, 세기말적 성격을 갖고 있던 나는 비빔밥을 비비다가 튀어나온 밥알 한 톨처럼 우두커니 서서 학교 풍경을 구경하다가 수업에 들어갔다.
두 번째 수업이 끝났다. 벌써 친해진 동기들은 무리를 지어 어딘가로 갔다. 당구장 갈까? PC방이나 갈까? 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갈 데가 없었다. 학생회관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어느새 4층, 산악부실 앞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문이 열려 있었다. 반갑기보다 떨렸다. 이번에는 공포 때문에 떨린 게 아니라 긴장해서 떨렸다. 문 밖으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이고, 새꺄! 그만 자고 일어나. 어제 또 몇 시까지 마셨어? 집에 또 안 들어갔어? 며칠째야?"
꺼림칙했는데 내 다리는 저절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섰다. 아까 봤던 긴 얼굴의 남자와 입 옆에 점이 있던 남자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런 베개 위로 그들의 떡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앞에서 누군가 그들이 먹다가 남긴 것들을 치우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문 앞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나는 대답했다.
"네, 저 아까도 왔는데, 산악부 들고 싶어서요."
"아,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저기 잠깐만 앉아 있으세요. 새꺄! 일어나! 손님 왔어!"
그는 황급히 침대 앞에 어질러진 그릇들과 소주병을 치웠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그걸 구경했다. 인공암벽에 적힌 공포스런 글귀가 또 눈에 띄었다. '소주 맥주 막걸리 男 女.' 그냥 나가버릴까? 생각하던 찰나 청소를 대충 마친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남자는 얼굴이 시커맸다. 나이가 나보다 열살은 많아 보였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냥 찾아왔어요."
"무슨 학과죠?"
"신소재공학과요."
"아, 그놈이랑 같은 과네! 산악부엔 왜 가입하려고 하죠? 어디서 알고 왔어요? 우리가 뭐하는 동아리인지는 알아요? 가만있자, 밥은 먹었어요? 아이고 그만 좀 일어나 새꺄! 야, 일어나! 미안해요. 그저께 산에 갔다와서. 원래 이렇지 않아요. 일어나 임마! 저, 몇 학번처럼 보이나요?"
질문이 쏟아졌다. 질문이 너무 많고 어수선해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공포스러웠던 동아리방 분위기가 시트콤 장르로 바뀌었다. 웃겼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진지했으니까. 알피니스트가 되고 싶었으니까. 고등학생 때 봤던 대학교 산악부원들은 머리에 떡이 지지 않았으니까. 다음에 계속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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