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광주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 미·독·일 등 해외에서 광주 응원…14개국서 100회 이상 집회
- 광주 상황 빠른 전파…선교사 등 ‘숨은 조력자’ 도움 많았다
- ‘국제 연대’ 관련 연구 빈약…‘응원과 지지’의 기억 복원해야

■ ‘나라 밖에서 광주를 외치다’ …그때는 우린 몰랐다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 5월 25일 일요일.
광주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던 그때, 워싱턴 미 국무부 건물 앞에 일단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을 소리 높여 규탄했다.
같은 날 뉴욕 맨해튼의 뉴욕타임스 앞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열렸다. 교포 2백여 명이 태극기를 단 자동차 50여 대에 나눠타고 차량 시위까지 벌였다.
일본 도쿄의 나리타 국제공항, 그날 거기에서도 교포 수십 명이 광주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떠들썩한 집회를 벌였다.
그러나 그때는 우린 몰랐다.
나라 밖에서 우리 유학생들과 교포들이 고국에서 투쟁하는 광주 시민들을 위해 함께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 ‘고립무원’ 광주의 참상, 해외에 먼저 알려져

80년 5월 광주는 마치 고립무원의 섬과도 같았다.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광주로 통하는 모든 진출입로가 통제됐고 전화와 우편 등 통신이 두절됐다. 차가 멎고 전화가 끊겨 광주의 비극과 참상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신군부의 보도 통제로 이따금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뉴스가 신문과 방송의 한구석을 채우는 것이 전부였다.
광주는 그렇게 고립됐고 외부 세계와 단절됐다. 밖에서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 설상가상 전국에 내려진 비상계엄으로 ‘광주’라는 두 글자에 대해선 침묵 아닌 침묵이 강요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눈과 귀가 막혀 있을 때 광주의 참상은 해외에 더 먼저 알려졌다. 미국과 일본, 독일 등 몇몇 외신을 통해서였다. 국제사회는 광주 상황의 심각성과 신군부의 만행에 경악했다.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고 광주 시민들을 구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당시에도, 항쟁 이후에도 한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광주를 향한 응원과 연대의 목소리가 나라 밖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음을….
■ 미주 동포들이 먼저 움직여…UN 본부서도 시위
가장 먼저 행동을 시작한 것은 미주 동포들이었다. 광주항쟁이 터지고 사흘 뒤인 5월 21일, LA 한인 상가 앞에서 교민 30여 명이 처음으로 시위를 벌였다. “고국의 무고한 시민들이 계엄군들로부터 무차별 학살을 당하고 있다. 유혈 진압을 멈춰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당시 한인 유학생과 교포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미주 한국 민주 학생 총연합회는 광주 시민들을 구하자며 의용군을 모집했다. 학생 대표로 활동했던 이갑산 씨는 “신문광고를 보고 학생과 시민 17명이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LA 총영사관의 비자 발급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용군 파견이 무산되자 교포들은 유혈사태가 터진 광주에 피를 보내자며 집단 헌혈에 나선다. 참가자는 230여 명, 이들은 24일 LA 적십자사를 점거하고 “그 피를 광주로 보내주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며 헌혈 농성까지 벌인다.
하지만, 이 또한 대한적십자사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광주 현지에 피가 부족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연관 기사] [단독] LA 교포들 “5·18 때 광주에 ‘의용군’ 보내려 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563901&ref=A
뉴욕과 워싱턴 교포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23일 뉴욕 유엔대표부 앞과 뉴욕 총영사관, 워싱턴 미 국무부 앞에서 교포 수십 명이 ‘계엄 해제’, ‘군부 퇴진’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25일에도 교포 200여 명이 뉴욕타임스 사옥과 미 국무부 앞에서 광주 유혈진압을 강력히 규탄했다. 교포들은 태극기를 단 50여 대의 자동차에 분승해 차량 시위까지 벌였다.
25일 뉴욕 한인교회에서는 교인총회를 열고 광주 상황을 성토하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구국기도회 등을 잇달아 개최했다.

<1980년 국내정세에 대한 미국 반응과 재외 동포 반한단체 동향>이라고 적힌 외교부 외교 사료를 보면 광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던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LA와 뉴욕, 워싱턴, 시카고, 애틀랜타, 캐나다 토론토 등지에서 교포들이 시위와 집회를 잇달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유럽 교민 사회도 들끓어…“우리도 함께 싸우고 있다”
같은 시기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교포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80년 5월 28일 재독 한국 유학생들이 광주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같은 날 프랑크푸르트 니콜라이 교회에서도 ‘광주 시민과 연대하는 한국인 모임’ 회원 50여 명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독일 공영방송이 광주에서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방영한 것을 계기로 교민 사회가 들끓었다. (우리에게 ‘푸른 눈의 목격자’로 잘 알려진 故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독일 공영방송 ARD 산하 NDR의 일본 특파원이었다. 80년 5월 20일 광주에 잠입해 공수부대의 잔인한 학살과 만행을 카메라에 담아, 그 영상을 독일로 송고했다.)

5월 30일 서베를린의 가장 번화가인 쿠담에서는 광주 학살 성토대회가 열렸고 올리버 광장에서 비텐베르크 광장까지 가두행진에는 500여 명이 참가했다. 주로 유학생과 파독 간호사, 한국인과 독일인 부부 등이었다.

31일에는 수도 본에서 교포와 유학생 4백여 명이 광주 학살 만행을 성토하는 시위를 벌인 뒤 ‘광주 시민과 연대하는 재독 한국 학생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광주 사건의 진상을 알릴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다고 온 세계에 알려 주시오’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만들어 독일은 물론 미국과 일본의 한인 단체와 국내외 신문사와 대학 총학생회 등에 배포했다.

5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도 교포들이 독재정권 타도와 애국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5월 20일 영국 런던에서는 국제 신문 편집자 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가 한국의 언론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 5·18 응원과 지지, 일본이 가장 많았고 격렬했다
5·18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나라 밖 활동은 일본이 가장 많았고 또 격렬했다. 외교부가 만든 당시의 <반한단체 동향 및 대책> 문건에서도 “일본이 가장 악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5월 22일 도쿄에서 교포 3백여 명이 광주 탄압을 규탄하는 집회를 연 데 이어 24일에는 한국대사관 앞에서 교포 250여 명이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 문제 기독자 긴급회의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정부에 ‘연행 학생 석방과 전두환 사령관 해임’ 등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발표했다.
26일 한국 민주화 기독교 동지회도 광주에서 시민 무장은 군의 비인도적 폭거에서 비롯됐다며 군의 무력행사를 중지하도록 각국 정부와 교회가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25일에는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 개항 2주년을 맞아 교포들이 공항 밖에서 광주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31일에는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 70여 명이 전두환의 해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교포 10여 명은 6월 2일부터 열흘간 히로시마에서 도쿄까지 1,000km 장거리 행진을 하며 광주 진압에 항의했고 한국대사관 앞에서 국보위 해체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5·18의 만행을 규탄하는 해외 동포들의 시위와 집회는 재외공관에서 외교부에 보고한 것만 해도 5월 20일부터 6월 10일까지 6개 나라에서 19건이나 된다.
미주와 일본 지역 말고도 베를린과 파리, 런던, 홍콩과 태국 등에서 각종 시위와 집회가 있었다. 1980년 상반기에만 14개 나라에서 100건 이상이 보고됐다. 집회는 헌혈과 모금, 성명서 발표와 여론전, 차량 행진과 구국기도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기간에 재미 서울대 동창회 등 12개 교민 단체는 뉴욕타임스에 ‘계엄령과 군사독재 반대, 미 의회 차원의 한국 사태 조사’를 촉구하는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 당시 광주 상황 전파…선교사 등 ‘숨은 조력자’ 있었다
이 같은 교민들의 노력은 박정희 시해 사건인 10·26 이후 일련의 한국 정치 상황과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교민들은 광주의 비극이 발생한 직후부터 사태의 진행 과정을 비교적 빠르고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주로 외신 보도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한국 관련 인권 네트워크의 정보 전달 채널이 신속히 가동된 덕분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국 출신 선교사나 목회자들이 1970년대 초반에 결성한 ‘월요 모임’(Monday Night Group)이었다.
5·18 직후인 5월 20일 시카고에서 아시아 인권 교회 협의회(Church Committee on Human Rights in Asia)가 발행한 ‘긴급 한국 행동(Korea Action Alert)’이라는 소식지도 월요 모임에서 작성한 사실 보고(Fact Sheet)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식지에는 광주에서 무력 충돌로 3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백악관과 국무부, 의회를 상대로 신속한 로비가 필요하다는 행동 지침까지 담고 있었다.

월요 모임에서 수집된 한국의 인권 탄압이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정보는 일본 교회 협의회 산하 한국 문제 기독자 긴급회의(Emergency Christian Conference on Korean Problems, ECC) 등을 경유해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지로 전파되고 있었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의 방한 당시 카터 행정부가 참조한 한국 인권 상황 보고서(Report on the Human Rights Situation in Korea)도 월요 모임이 만든 것이었다.
이밖에 한국 인권을 위한 북미 연맹(NACHPK) 등 다른 인권 단체들도 지속적으로 5·18 관련 정세 보고서를 배포했다. 광주 항쟁이 끝난 직후인 80년 6월에는 그간 수집한 정보를 종합한 ‘광주 보고서’(Report from Kwangju)를 발간했다.

일본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도 한국에서 전달된 5·18 민주화운동 기록을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알렸다.
5·18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정보를 취합해 일본의 ECC가 발행한 인권 소식지 「한국 통신」(Korea Communique)도 북미 여러 인권 단체나 활동가들에게 배포됐다.

■ 국제적 관심, ‘5·18 묵인’ 미국과 신군부에 큰 압박
이들이 수집하거나 제공한 광주와 한국의 정치 동향은 교민들이나 인권 단체들이 각종 시위와 성명서 발표, 희생자 추념과 언론 기고, 청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기폭제가 됐다.
이렇게 시작된 5·18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연대는 한국 민주화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5·18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미국 정부와 신군부에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나라 밖에서 광주 시민을 응원하고 지지한 수많은 해외 동포들과 이들을 지원한 조력자들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이제 더 이상 5·18을 논할 수 없게 됐다.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을 빼고 일제강점기 우리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한때 고립무원의 섬으로 여겨졌던 80년 5월 광주가 결코 외롭지 않은 이유다.
■ 5·18 연구 중에서 ‘국제 연대’ 관련 연구 가장 취약
하지만 5·18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나라 밖에서 광주를 응원한 다양한 활동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다.
광주 학살을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교포 사회와 국제사회가 보여준 뜨거운 연대는 그래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따금 나라별로 당시 사진과 자료 등이 간헐적으로, 단편적으로 공개돼 관심을 끌었을 뿐이다.
학계의 관련 연구도 빈약하다.
5·18 기념재단의 최용주 박사가 미국 UCLA 대학 동아시아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와 통일 관련 특별 컬렉션’에서 발굴해 내놓은 자료 등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따라서 광주 항쟁에 대한 국제적인 연대와 그 성격에 대한 분석은 5·18 연구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5·18기념재단도 40년 넘도록 진상규명에 매달리고 왜곡과 폄훼와 싸우다 보니 해외 연대에 대한 조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윤목현 기념재단 이사장은 "재단의 진실 규명팀이나 국제연구원이 협업해서 기존 해외 자료에 보태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수집하고 체계화하겠다. 아카이브화하고 책자로도 만들고, 인터넷 활용한 자료도 만들어 2년 안에 완성할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 5·18 숨겨진 진실, ‘응원과 연대’의 기억 복원해야
46년 전 5·18 광주 민주항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선 그 진상이 아직도 다 규명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이기에 그렇다. 또 해를 거듭할수록 5·18이 세계인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부 통치에 맞섰던 광주의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태국과 홍콩, 미얀마 등 다른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광주의 경험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에게 단순히 영감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연대하고 소통하며 적극적인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5·18 민주항쟁이 인류 보편의 민주와 인권을 수호하는 길잡이이자 동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성장한 오늘의 5.18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나라 밖 국제사회가 광주를 응원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던 역사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들이 있어 80년 광주는 외롭지 않았고 5.18이 세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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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환 기자 (2su3s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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