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덫에 걸린 이주비] “대출 꽉 막혀 이사 못 가”…멈춰선 정비사업
재개발ㆍ재건축 현장 르포
노량진1구역 70% 이주비대출 안 돼
청량리8구역도 자금 조달‘발목’
“집값 잡겠다고 되레 공급 옥죄”

[대한경제=이종무 기자]“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납해줘야 하고, 나도 이사갈 곳을 구해야 하는데 요즘 전셋값으로 어디서 살라는 건지 막막합니다.”
지난주 찾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1구역 재개발 사업지. 낡은 한 다세대주택 소유주 70대 A 씨는 한숨을 거칠게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다주택자로 기본 이주비 대출이 원천 차단됐기 때문이다. 또 다른 소유주 B 씨는 “정부는 우리가 무슨 투기꾼인 줄 안다. 세입자 내보낼 돈이 없어서 이주를 못 하는데, 공급 지연 책임을 왜 조합원들이 져야 하냐”며 반문했다.
1+1 분양 신청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1+1은 넓은 면적의 주택을 보유한 조합원이 소형 2가구를 분양받는 방식인데, 역시 다주택자로 취급돼 대출이 막힌다. 이 지역에 한 공인중개사는 “이 동네에서만 30년 넘게 살아온 분들인데 이주비가 나오지 않아 인근 지역 전세로도 이사가 불가한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17일 도시정비업계에 따르면 노량진1구역은 3000가구 규모다. 노량진 뉴타운에서 대어급으로 꼽힌다. 시공사로 포스코이앤씨를 선정하고 재개발을 추진 중인 가운데, ‘9부 능선’인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앞두고 대출 규제의 벽을 만났다. 조합원 962명 중 70% 가량이 이주비 대출이 나오지 않는 다주택자에다가, 1+1 신청자만 526명에 달한다.
다만 노량진1구역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재개발 조합이 사업비 우회 지원을 추진 중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으로 금융권에서 조달한 사업비 일부를, 다주택자 조합원의 임대차 보증금 반환에 활용하기로 했다. 세입자를 먼저 이주하게 하고, 나머지는 포스코이앤씨의 추가 이주비 대출로 마련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8구역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난해 9월 관리처분계획 인가를 받고 오는 24일까지 이주를 진행 중이지만, 시공사의 보증 한도 탓에 자금 조달이 발목을 잡고 있다. 청량리8구역 재개발 조합에 의하면 이곳 전체 조합원 234명 중 27%(63명)가 이주비 대출을 받지 못했다. 부족금액만 현재 16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가구 수와 층수 확대로 사업성을 개선했지만 정부의 지난 잇단 규제가 사업을 가로막는 형국이다.
앞서 서정숙 청량리8구역 재개발 조합장도 지난 2월 서울시에 탄원서를 전달하면서, “지금 재개발 현장은 퇴로가 막힌 전쟁터와 같다”며 “세입자 전세금도 상환하지 못할 처지에 놓여 철거와 착공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강남권 핵심 공급처로 기대를 모으는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3930가구)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최고 70층 6491가구 랜드마크로 탈바꿈할 예정인 이 단지는 아직 관리처분인가 전이어서 강화된 규제를 적용받는다.

잠실주공5단지는 기본 이주비 외 추가 이주비를 인근 전세가격을 고려해 시공사 연대보증으로 조달할 계획이지만, 추가 이주비 금리는 기본 이주비보다 0.8%포인트 이상 높아 조합원과 시공사 부담이 가중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시공사 입장에서도 신용 보강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한 보증이 아닌 회계상 우발 부채로 인식돼, 재무 부담이 된다. 일대에 한 공인중개사는 “이곳은 워낙 집값이 높다보니 이주비 6억원 한도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며 “이주 지연 우려가 커지면서 매수 타이밍을 재는 수요자들도 관망세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의하면 올해 이주를 앞둔 서울 내 정비구역 43곳 중 39곳, 모두 3만1000가구가 이주비 대출 규제 영향권에 있다. 시는 국토교통부에 이주비를 가계대출이 아닌 주택 공급의 필수 사업비로 분리해 LTV(담보인정비율)를 70%까지 적용해 달라고 건의했지만, 금융위원회는 아직 ‘다주택자 규제 예외는 검토한 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이다.
이주비 대출은 재개발ㆍ재건축 조합원이 공사기간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거나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 위해 기존 주택을 담보로 받는 대출이다. 준공 후 입주와 함께 상환하는 구조로, 본질적으로 주택 공급을 위한 사업비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동일한 가계대출로 분류하고 있어, 지난 대책(6ㆍ27 가계부채 관리 강화방안, 10ㆍ15 주택 시장 안정화 대책)을 통해 수도권 이주비 대출 한도가 LTV 40%ㆍ최대 6억원으로 묶였고, 다주택자는 대출이 봉쇄됐다.
서울 주택 공급이 사실상 정비사업에서 나오는 현실을 감안하면, 집값을 잡겠다는 규제가 오히려 공급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비판이 현장에서 거세지고 있다.
김진수 건국대 행정대학원 도시및지역계획학과 주임교수는 “이주가 막히면 철거가 늦어지고, 철거가 밀리면 착공ㆍ입주도 줄줄이 미뤄진다”면서 “이주비 대출 등 규제 완화가 공급을 실현할 수 있는 대책인데도, 실제로는 정부는 공급을 줄이는 규제 정책으로 일관하며 어불성설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무 기자 jm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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