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시각서 ‘한양 풍수’ 비판…첫 조선인들 ‘남산 뷰’로 맞섰다[장지연의 역사 상상력]

세종 때 최양선 “경복궁의 백악은 주산 아니다”…창덕궁 서편을 궁궐 옮길 ‘혈 자리’로 짚어
태조·태종 대 관원들은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물길 말랐다” 한양에 대해 부정적 평가 일색
개경 기준으로 보는 고려인 관점…조선서 성장한 이들은 남산에 올라 ‘새 프레임’으로 접근
남산에 있는 서울타워에 올라서 도심 방향을 내려다본다. 빽빽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멀리 북한산에서부터 뻗어 내리는 푸르른 산세가 창덕궁·창경궁, 종묘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보인다. 우뚝 솟은 백악과 그 아래 푸른 지붕의 청와대와 경복궁 역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종묘까지 이어지는 그 수풀의 풍성한 양감에는 미치지 못한다. 1433년(세종 15), 바로 그 관점에서 한양의 주산에 대해 딴지를 건 이가 있었다. 최양선, 풍수를 공부해 관련 관청에서 일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경복궁의 북산은 주산이 아닙니다. 목멱산에 올라 바라보면, 향교동으로 이어지는 줄기인 지금의 승문원 자리가 실로 주산입니다. 도읍을 정하던 때에 어찌하여 궁궐을 여기에 짓지 않고 백악 아래에 지었을까요? 지리서에서는 ‘인가가 주산의 혈에 있으면 자손이 쇠미해진다’고 했으니,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에 옮기면 만세에 이익이 되겠습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3일)
승문원 자리는 창덕궁 서편이다. 최양선은 경복궁 북쪽의 백악이 아니라 창덕궁 쪽으로 내려오는 응봉의 연맥이 주산이라고 보았다. 아니, 창덕궁조차도 정확한 혈 자리가 아니며 그 서편이 혈 자리라고 했다. 최양선은 태종 대 풍수학생이던 시절 한양의 서전문을 열자고 한 것을 필두로, 나라 곳곳의 풍수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다. 한양의 주산 문제를 꺼내기 3년 전에는 헌릉(태종의 능)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그 주변의 고갯길을 막아야 한다고 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논란은 한양의 주산 논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위가 한창이던 세종 15년 음력 7월 내내 조정은 최양선이 던진 한양의 주산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다.
천도할 당시의 근심, 물길
태조 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와 태종 대 다시 한양으로 천도할 때 모두 풍수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부분 한양으로 천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때니, 한양의 풍수에 대해 나올 만한 안 좋은 평이 다 나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정적인 평가가 도드라진 것은 태종 대 재천도를 위해 한양과 무악을 다시 살펴보던 때다.
무악을 살펴보던 날, 서운관 관원들은 무악과 한양을 비교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한양의 단점을 지적하기 바빴다. 가장 혹독하게 비판한 사람은 윤신달이었다. 그는 “지리로 논하면 한양은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명당의 물이 끊겨 도읍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무악이야말로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추켜세웠다. 유한우는 무악에 대해 호평하지는 않았으나 “한양이 앞뒤로 석산이 험하고 명당에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가 없다”는 윤신달의 평가에는 그대로 동의했다. 거기에 “지리서에서 ‘흐르는 물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끊긴다’고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도읍에 사람이 끊긴다는 말이니, 왕조가 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극언이었다. 이양달은 그나마 조금 다른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한양이 비록 명당에 물이 없다고는 하지만, 광통교부터 그 위로는 물 흐름이 있습니다. 전면에 물이 있고 사방을 감싸고 도니 조금은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그러면서 무악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태종실록> 태종 4년 10월4일).
윤신달, 유한우, 이양달 등 서운관 관원들은 무악에 대해서는 조금씩 판단을 달리하기는 했지만, 한양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이 이처럼 극언에 가까운 비판을 한 것은 전후좌우 눈치가 빤했기 때문이다. 서운관 관원들의 답변은 태종의 질문에서 비롯했는데, 사실 질문 이전에 답변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태종은 관원들을 이끌고 무악의 중봉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며, “여기가 도읍하기에 합당한 땅”이라고 먼저 운을 뗐다. 그러면서 서운관 관원들에게 거리낌없이 자기 말을 다 하라며, “이 땅(무악)과 한양 중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다. 무악은 임금의 오른팔 하윤이 건의했다. 직접 후보지를 살펴본 자리에서 이미 임금이 여기야말로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평가했다. 답변의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사회생활 좀 해본 사람이면 다 안다. 윗사람의 ‘거리낌없이 자기 말을 다 하라’는 말은 대체로 ‘내가 원하는 답을 대신 말해줘’의 뜻이라는 것을.
논의의 분위기와 결론은 잠시 젖혀두고, 한양의 문제에 다시 집중해보자. 서운관 관원들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한양에 대해 공통적으로 한 설명이 있다. 전후에 석산이 험하고 물길이 말랐다는 평가다. 이는 태종 대 처음 나온 얘기도 아니다. 태조 대 천도 논의에도 참여한 윤신달은 “우리나라 경내에서 송경(개성)이 가장 좋고 이 땅(한양)이 그다음입니다. 한스러운 점은 건방(북서쪽)이 낮고 물길이 말랐다는 것뿐입니다”라고 설명했다. 태조는 짐짓 한양을 맘에 두고 있으나 신하들은 개경에 그대로 있자고 하던 때, 그에 맞춰 답변을 했기에 결론과 어조는 다르지만 한양 풍수에 대한 평가는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앞뒤로 돌산이 험하고 물길이 부족하다는 것. 처음 천도할 당시 한양의 풍수에서 문제시됐던 것은 주산이 아니라 물길이었다.

남산에서 시작한 새 프레임
세종이 최양선의 주장을 면밀히 살펴보자고 결정하자, 곧 첨예한 논쟁의 장이 펼쳐졌다. 태조 대 천도 논의 때부터 참여해온 풍수계의 중진 이양달은 백악이 주산이 맞다며 최양선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했다. 풍수학인들의 분분한 공방에 판단이 어렵자, 세종은 직접 경연에서 풍수설을 공부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영의정 황희 등 최고위급 관료들에게 직접 풍수를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 답사하고 지도를 그리게도 했다. 이때 양측은 삼각산에서 내려온 맥이 보현봉을 거쳐 어떻게 펼쳐져 가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논쟁했다. 핵심은 가운데에 위치한 주산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백악을 옹호하는 측은 백악을 기준으로 해야 명당의 전후좌우가 ‘균제하고 방정하다’고 평한 데 비해, 최양선 등은 승문원 연맥이야말로 가운데에 위치한 바른 맥이라고 보았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9일).
어느 쪽의 의견이 맞는지를 떠나 이들의 논의에서는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타락산’, 지금은 ‘낙산’이라고 부르는 동대문 북쪽의 산세에 대한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악, 인왕, 무악, 남산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데 비해 한양 도성의 좌청룡맥으로 꼽히는 타락산은 언급되지 않고, 동대문, 혹은 동대문 수구로 이어지는 맥세 정도로 설명이 된다. 지금처럼 한양의 사신사 중 ‘우백호 인왕산, 좌청룡 타락산(낙산)’이라고 하는 대칭적 인식과 명칭이 분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이때 누구의 풍수 해석이 맞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며 별 의미도 없다. 당대에도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괜히 임금이 나서서 논란에 불붙이는 바람에 후세에 쓸데없는 부담만 안겼을 뿐이다. 다만 이런 논의를 통해 시대와 사람이 바뀌면 생각과 해석의 관점도 바뀐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태조 대 처음 천도를 논의할 때에는 고려 숙종이 찾은, <도선비기> 속의 ‘면악’이 어디인지를 비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록에 대놓고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도선비기>는 조선 초에도 여전히 주요 참조 서적이었고, 백악 아니면 삼각산이 바로 그 ‘면악’이라 여겨졌다. 북쪽에서 내려오며 개경과 비교하면서 천도지를 찾은 이들은 삼각산을 기준으로 터를 살폈지, 남산에는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한양이 석산이 험하다거나 물길이 짧다는 근심도 개경을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양은 개경에 비해 석산이 험했고, 개경에 비해 물길이 풍부하지 않았다. 무악을 건의한 하윤도, 한양을 비판한 윤신달도 모두 그 지세 판단의 기준에 개경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성장한 새 세대가 땅을 보는 관점은 달랐다. 최양선은 남산에 올라 지세를 살폈다. 그는 명당의 기준으로 개성을 언급한 적이 없으며, 물길은 전혀 문제 삼지도 않았다.
고려인 출신의 조선인이 개경이라는 과거의 프레임으로 한양을 접근했다면, 첫 조선인들은 새로운 프레임으로 한양을 보았다. 과거의 프레임이 낡은 사고에 근거했기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면, 무책임한 새 프레임은 별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훗날 새로운 논쟁을 빚어낸다. 오늘날 우리가 서울타워에서 보게 되는 푸르른 도심의 지세는 조선 초 신구 세대의 서로 다른 해석이 대립하던 현장이다. 무심한 땅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해석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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