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제시’ 북 여자축구단…대 이은 남북 스포츠 교류

유지향 2026. 5. 1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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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권' 내민 북한 '내고향축구단'…'적대적 두 국가' 속 교류 돌파구 주목
◎ '1966년 월드컵 신화' 부친 리찬명 이어 아들 리유일 감독까지…대를 이은 방남

(△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 리유일 감독(좌)이 12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남북 여자축구 대결을 하루 앞두고 19일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우측은 내고향축구단 주장인 김경영 선수.)

■ 북 여자축구팀 감독 "오직 경기만 집중…응원단 상관할 문제 아냐"

"응원단 문제는 우리가 상관할 문제는 아닙니다. 오직 경기에만 집중하겠습니다."

평양을 근거지로 한 북한 여자축구 클럽팀 '내고향축구단' 리유일 감독은 오는 20일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을 앞두고 이렇게 입장을 밝혔습니다.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릴 준결승전 상대는 우리나라 '여자 축구 간판 스타' 지소연 선수가 이끄는 '수원 FC 위민'. 우리 안방에서 '남북 축구 대결'이 펼쳐집니다.

◎ 리유일 평양 '내고향여자축구단' 감독
(2026.05.19, 수원종합운동장 기자회견장)

"내일 경기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건 철저하게 경기를 하러 왔습니다.
응원단 문제는 우리가, 저는 감독으로서 우리 팀 선수가 상관할 문제는 아닙니다.
오직 경기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축구 종목으로만 보면, 북한 선수들이 대회 참석차 우리나라를 찾은 건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입니다. 종목을 불문한 선수단 전체로 보면, 2018년 12월 인천에서 열린 국제탁구대회 '남북 혼합복식 출전' 이후 7년 5개월 만입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23년 12월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로는 처음입니다.

■ 북측 선수들, 여권 제시…통일부 "우리는 교류협력법 체계 따라"

(△ 북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들이 지난 17일 베이징 경유 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지난 17일 베이징을 경유해 항공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 온 북한 여자 축구팀 선수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북측 선수들은 전원 여권을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북한의 '두 국가' 기조 선언 전까지는 북측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찾을 때 우리 당국이 승인한 '방남증명서'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북측에서 '다른 나라'라는 걸 상기시키려는 듯 '여권'을 제시한 것입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우리는 남북교류협력법 체계에 따라 확인했고, 여권은 참고 자료이다'고 설명했습니다.

리유일 감독은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수원 FC 위민·내고향여자축구단 공동 응원단'에 대해서도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자신들은 스포츠 국제경기를 하러 온 선수단임을 강조했습니다.

■ 지소연 "한국에서 하는 4강 기뻐…이런 관심은 축구하면서 처음"

( △ '수원 FC 위민'의 지소연 선수(우)가 19일 잇따라 열린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경기에 임하는 포부를 밝혔다. 좌측은 '수원 FC 위민' 감독인 박길영 감독.)

'수원 FC 위민'의 주장인 지소연 선수도 19일 기자회견에서 "'내고향축구단'이 사실상 북한 국가대표팀이라고 할 정도로 전력이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비상한 각오로 경기에 임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내고향축구단 선수들 가운데 국가대표 선수가 굉장히 많고, 내고향축구단 리유일 감독도 과거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을 지도했던 만큼, 지 선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승부욕을 보였습니다.

◎ 지소연 '수원 FC 위민' 주장
(2026.05.19, 수원종합운동장 기자회견장)

"(우리) 선수들도 물러서지 않고 욕하면 욕해주고
발로 차면 발로 차서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북한인만큼 관심들도 많이 가져주시고
취재진분들도 많이 보는 건 축구하면서 처음인 것 같아요.
보여주신 관심에 보답할 수 있게 최선 다하겠습니다."

지소연 선수는 "한국에서 4강전을 하게 돼 기쁘게 생각하고, 내일 경기만 집중하고 싶은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여자축구에 보여준 뜨거운 관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도 했습니다.

남북 양측 선수단 모두 정치적 배경을 떠나, 스포츠 국제경기에 임하는 '승부사'로서의 각오를 단단히 다진 분위기입니다.

■ 리찬명 전 감독 이어 '아들 리유일 감독'까지...남북 스포츠 교류의 산 증인

( △ 리찬명 전 북한 U-17 남자 청소년 축구대표팀 감독(좌)이 지난 2007년 경기 참석차 한국에 왔다. 우측은 당시 남북체육교류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김경성 현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이번 대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북측 사령탑인 리유일 감독의 특별한 '가문 내력'입니다. 리 감독의 부친은 세계 축구 역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리찬명 전 북한 U-17 남자 축구 대표팀 감독입니다.

리찬명 전 감독은 지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19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북한의 골문을 지키며 사상 첫 북한의 '월드컵 8강 신화'를 일궈낸 전설적인 골키퍼입니다. 특히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당대 세계 최강이었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1대 0 '무실점 완봉승'을 거두며 세계 축구계를 경악하게 한 주역이기도 합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한 리찬명 전 감독은 지난 2007년 한국에서 열린 'FIFA U-17 (17세 이하) 월드컵' 당시 청소년 남자 축구대표팀 북측 단장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해 남녘 땅을 밟았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인 리유일 감독까지 이번 대회를 통해 우리나라를 찾게 되면서, 이들 부자는 대를 이어 남북 스포츠 교류의 최전선을 지킨 산 증인이자 역사의 주역이 됐습니다.

■ '경평 축구'부터 '평창'까지…체제 경쟁 넘어 대화의 물꼬로


사실 '축구'를 필두로 한 체육 교류는 남북 분단사와 늘 궤를 함께 하며 막힌 혈을 뚫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역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였던 192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경평 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경성(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린 이 축구대회는 나라를 잃은 암흑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단합을 도모하고 자긍심을 고취하는 사실상 유일한 분출구였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일본 세력을 압도하는 저력을 보여주며 '나라 잃은 한'을 민족적 자긍심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종종 일본팀을 상대로 무실점 대승리를 일궈내며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적 위로를 건네고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분단 이후 냉전 체제가 공고해진 박정희-김일성 정권 시절에는 축구장 그라운드가 철저한 '체제 경쟁의 산물'이자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양지 축구단'과 북한의 '천리마 축구단'은 체제의 자존심을 내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남북한 축구가 아시아 정상을 다툰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맞붙은 남북한 축구팀이 축구 역사상 이례적으로 승부차기를 진행하지 않고 '남북 공동 우승'이라는 결론을 낸 것 역시 당시의 정치적 결정이 반영된 산물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스포츠는 정국이 얼어붙을 때마다 늘 반전의 카드가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2007년 'FIFA U-17 월드컵' 당시 북측 선수단의 방남을 비롯해, 가깝게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경색된 정국 속에서 언제나 남북 대화의 물꼬를 터준 것은 다름 아닌 체육 교류였습니다.

■ "민간 체육 교류의 견고한 신뢰…남북 관계 물꼬 터와"

(△ 현철윤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 단장이 지난 17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현 단장 뒤쪽 좌측 인물이 리유일 감독.)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은 '내고향축구단'의 리유일 감독과 현철윤 단장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민간체육 교류를 통한 남북간 신뢰를 강조했습니다. 김경성 이사장은 "2007년 U-17 월드컵 당시 리찬명 선생과 남북 공동 단장을 맡으며 인연이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2015년 평양에서 제2회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를 공동 개최할 때, 당시 '평양국제축구학교장'이었던 현철윤 단장과 당시 '15세 이하 평양국제축구학교 대표팀'을 이끌던 리유일 감독과 신뢰를 쌓았다고 전했습니다.

이번 방남에서 현철윤 선생이 '단장'으로 앞장서고, 리유일 감독이 '사령탑'으로 남측을 찾았다며 "이분들과의 십수년에 걸친 끊어지지 않은 인연이 바로 민간 체육 교류가 얼마나 견고한 신뢰 위에 서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표"라고 김경성 이사장은 말했습니다. 그는 2006년부터 22차례나 '남북 유소년 축구대회'를 성사시키며 남북 관계의 물꼬를 터왔다고 자부했습니다.

■ '적대적 두 국가'의 냉기 속…축구장에서 발견한 작은 실마리

(△ 오는 20일(수) 저녁 7시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 FC 위민'과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준결승전이 열린다. KBS가 지상파 가운데는 단독으로 KBS 1TV를 통해 5.20(수) 저녁 6시 50분부터 중계 방송한다.)

현재 남북관계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엄혹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번 북측 선수단의 여권 제시 역시 분단의 현재적 자화상이자 달라진 기조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하지만 정치가 쳐놓은 높은 장벽 속에서도 스포츠라는 순수한 경쟁의 무대는 결국 문이 열렸습니다. 12년 만에 우리나라 잔디밭에서 펼쳐지는 이번 남북 여자축구 대결이, 얼어붙은 '두 국가' 기조 속에서 다시 한번 작은 교류의 기회를 마련하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 안팎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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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향 기자 (nausik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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