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18) 초교 자퇴 대구 백금옥 여사가 장학·육영·학술사업에 남긴 위대한 유산, 이제는 기려야

최미화 기자 2026. 5. 1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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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옥장학회는 무학의 대구처녀할머니 백금옥 여사가 온 생애를 바쳐서 설립한 서울 금옥여중고(현 금옥중, 금옥여고)와 지난 79년에 설립된 참사랑의 현장이다. 금옥장학회 제공

사람의 한 생은 무엇으로 평가받고, 대구시민의 자부심은 어떻게 인정받을까? 물론 타시도와 비교하는 소득수준, 기술력, 접근성, 환경권, 청년일자리, 교육·의료여건, 양성평등성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사는 낙(樂)이 있는 도시 대구시란 평판을 들으려면 어떤 사람들이 모여사느냐에 직결된다.

비록 아직 고향 대구에 기념비나 기념관 하나 없고, 육영사업가나 사회사업가로 먼저 떠올리는 시민들은 별로 없지만, 초교 중퇴의 대구 처녀할머니 곤계 백금옥 여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발하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 육영사업, 학술지원을 계속하고 있는 불멸의 존재이다. 온 생애를 바쳐서 하고 싶어도 생계를 위해 놓아야만했던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역경을 헤쳐서 아무도 끌 수 없는 빛이 된 곤계 백금옥 여사와 같은 인물이 도시의 자부심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백금옥 여사의 뜻을 기리는 대구시민들이 더 많아져서 기념비도 세우고, 기념관도 지어서 세상에 당당하게 알려야한다.
곤계 백금옥 여사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여성이 배울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온 삶을 바친 참사람이다. 금옥장학회 제공
흔히들 대구경북 육영사업의 선두주자로 김천고를 설립한 최송설당 여사, 대구 복명초등학교를 세운 김울산 할머니를 손꼽는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분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육영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 문화운동가가 바로 백금옥 여사이다. 노산 이은상은 「곤계송」에서 백금옥 여사를 곤륜산 계곡속에 깊이 숨긴 옥이 햇빛 아래 나타나 그 모습 눈부시니 만인이 보배로 받들어 길이 지니리라고 노래했다. 대구시민만 모르지, 백금옥 여사의 뜻은 그만큼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대변한다.
육영사업, 장학사업, 학술재단을 위해 전재산을 바친 백금옥여사를 기리는 단행본과 금옥장학회보.
백금옥 여사는 1918년 1월1일 대구 대신동에서 아버지 백경철과 어머니 박분이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경철은 대구3.8만세운동에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등 열심히 뛰어들었다가 왜경의 체포를 피해 골방에 숨어지냈으나 딸 금옥이 4세 때에 병사했다. 세딸(금옥과 두 동생)을 데리고 행상하던 어머니가 몸져 눕자 모범생 금옥은 스스로 대구고등보통학교 5학년을 중퇴하고, 사과장수로 나섰다. 인교동에서 삼덕동까지 골목골목 사과를 팔던 금옥은 어느날 서문시장을 벗어나 대구읍성 서문터로 가는 길목의 큰 기왓집(현재 우현서루) 주인 이일우에게 사과를 팔았다. 나중에 그 기왓집이 우현서루이고, 그 우현서루에서 김지섭(일본 황궁에 폭탄 던진 지사)과 같은 항일운동청년들이 많아지자 왜경이 강제로 문을 닫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분발심을 갖게 됐다.
1만여평의 넓은 터에 자리잡은 금옥여자중고등학교를 자신의 죽음과 함께 공립으로 헌납한 것을 기념하는 비. 『백금옥 여사』(금옥장학회 발간)에서 촬영.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학교를 세워야해. 나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공부를 가르쳐주는 학교 말이야.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상급학교를 더 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보람있는 큰 일을 하는거야. 백금옥, 힘 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발심을 한 백금옥은 돈을 벌기 위해 한겨울에 시래기를 너무 많이 주어오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으며, 낮에는 백화점 직원, 밤에는 야학에서 공부했고, 이후 달성토성 앞 대구천이 달서천과 만나는 지점에서 식당을 하고, 해산물 도매상, 양곡 도매상, 부동산 임대업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학교 설립"의 꿈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타계하자 대구 법성사에 모신 뒤, 비누공장 동업 경영 등으로 큰 기업가가 된 백금옥은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옮겼다.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꼭 학교를 세워라. 네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돈버는 일에만 노심초사 인생을 바치는 것은 가난한 집 아이들이 다시는 너처럼 가슴아픈 경험을 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 아니냐"는 유언과 함께 일제 말기에 잃어버린 두 여동생 복수와 복술이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들을 찾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이미 대구는 십수년 찾았지만 허사였다.
백금옥 여사가 타계하기 두달여전인 1979년 2월21일에 열린 금옥여중고 기공식에서 인삿말을 하고 있다. 금옥장학회 제공

서울에서 헌집을 수리해서 팔면서 공사감독을 직접하면서 헌 벽돌을 쓰거나 벽돌에 물을 먹이는 사기성 업자들을 끊어버리고 양심적인 사장들과 손잡은 백금옥은 담장, 대문, 지붕, 창호, 도배, 마루, 수도, 전기 등을 척척 해내는 '금옥 사단'까지 만들 정도로 평판을 얻었다. 당시 일반화되지 않은 주식투자도 했다.

57세가 된 백금옥은 학교설립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민관식 문교부 장관을 만났다. 학교설립이 잘 추진되던 중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됐다. "사람의 운명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일은 차일피일 미뤄서는 안된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는 격언도 있지 않나"고 다짐한 백금옥은 1978년 1월31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의 소망을 담은 문서를 보냈는데 놀랍게도 단 3개월뒤인 1978년 4월29일 금옥학원 설립허가가 났다. 백금옥 여사의 진심어린 사연을 접한 박 대통령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과제인 학교신설을 개인이 큰 돈을 들여 대신하겠다니 최대한 신속히 집행되도록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서울 금옥중·금옥여고 교정에 있는 백금옥 여사의 묘소 앞에선 모산 심재완 박사(당시 금옥장학재단 이사장)과 박윤근 금옥학술재단 이사장. 필자는 모산 선생님과 같이 금옥여중고를 방문, 곤계 백금옥 여사 묘소 등을 찾아뵌 적이 있다. 금옥장학회 제공.

희소식을 받은 백금옥은 바로 어머니를 모신 대구 법성사를 찾아 영전에 경과를 보고하면서 장학회 설립 구상까지 발표했다. 이와함께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사립(금옥여중고)으로 운영하고, 제가 죽은 후에는 나라에 헌납해서 공립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천명했고, 서울 신정동 117번지 1만여평에 세워진 금옥여중고는 (백금옥여사 타계 후 문을 연 지라)개교부터 공립 금옥중·금옥여고로 살아남았다.

유방암이 간암으로 전이되면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큰 부자 백 여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근검절약을 지켜 '3등 병실'에서 생활하다가 학교 개교 소식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동생 복술을 만났다. 이듬해 1979년 2월21일 금옥여자중·고등학교 기공식을 열었고, 기공식 후 69일째인 1979년 5월1일 세상을 떠났다. 금옥여중고는 곤계 백금옥 여사 타계 이후인 1981년 1월15일에 개교했다. 백금옥은 이 세상에서 '61년'의 길지않은 삶을 살면서 서울에 육영사업인 금옥여중고 개교 운영과 금옥학술재단 설립, 그리고 대구에 금옥장학회를 통한 장학사업의 틀을 만들어놓고 타계했다.

금옥장학회 이사장을 지냈던 고(故) 모산 심재완 박사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굳센 의지로 재산을 모아 큰 일을 해낸 인간 승리자 곤계여사의 큰 꿈을 젊은이들이 배워서 다시 자기의 꿈을 키우기를 바란다"고 단행본 『참사람 백금옥』(재단법인 금옥장학회 펴냄)에서 밝혔다.

"타계 두달여전인 1979년 2월26일에 세워진 대구의 금옥장학회는 백금옥 여사께서 남기신 유산과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올해로 48회째를 맞았고, 그동안 약 1만명의 장학생을 배출하면서 31억여원을 지원했다"는 심원필 금옥장학회 이사장은 "올해부터 장학생과 장학금 명칭을 백금옥장학생, 백금옥장학금으로 부르고, 금옥장학대상을 제정했다"면서 "올해 백금옥장학생들이 내년 장학생들을 격려하고, 언젠가 백금옥장학생 가운데 금옥장학회 이사장도 나오기를 바란다"고 간절한 바람을 드러냈다.

지금 대구에는 백금옥 여사의 추모비나 기념관 하나 없다. 이제 곤계 백금옥 여사를 위한 기념사업에 뜻을 세운 금옥장학회에 대구시민 누구나 동참하여, 군위군 대구편입으로 더커진 대구가 제대로 사람사는 낙이 흘러넘치는 도시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관련기사 19면)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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