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뺀 넷플릭스보다 위험해진 파라마운트..WBD 인수전의 역설 [엔터코노미]

이해정 기자 2026. 5. 1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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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각 사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 인수전은 결국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파라마운트)의 승리로 기울었다. 넷플릭스는 재입찰 대신 포기를 택했고, 파라마운트는 가격 인상과 위약금 부담, 추가 자금 지원 약속까지 동원하며 거래를 사실상 성사 직전 단계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시장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끝까지 밀어붙여 승리한 파라마운트보다, 중도에 발을 뺀 넷플릭스가 오히려 더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이번 인수전이 단순한 기업 간 거래를 넘어 콘텐츠 산업의 생존 전략 차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12월 WBD의 TV·영화 스튜디오와 스트리밍(HBO Max) 부문을 주당 27.75달러, 총 720억달러 규모에 인수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전액 현금 지급 의사까지 밝히며 거래 성사 가능성을 높였다.

이에 맞서 파라마운트는 수차례 인수 가격을 끌어올렸다. 주당 30달러, 총 1080억달러 규모의 전액 현금 인수를 제안했지만, WBD 이사회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만 해도 시장에서는 넷플릭스가 유력한 승자로 평가됐다. HBO와 워너브라더스, DC, CNN 등 핵심 콘텐츠 자산이 넷플릭스의 플랫폼 경쟁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란 기대도 컸다.

하지만 파라마운트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자사가 추천한 이사를 WBD 이사회에 진입시키기 위한 위임장 대결(proxy fight)까지 검토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후 주당 31달러, 총 1110억달러 규모의 수정 제안서를 제출하고, 넷플릭스와의 계약 파기에 따른 28억달러 위약금까지 대신 부담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의 대규모 자금 지원 가능성까지 부각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WBD 이사회는 파라마운트의 손을 들어줬다. 가격과 현금 동원력, 거래 성사 가능성 측면에서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사회는 넷플릭스 측에도 조건 수정 기회를 줬지만, 넷플릭스는 추가 경쟁에 나서지 않았다. 테드 사란도스와 그렉 피터스 공동 CEO는 "이번 거래는 적정 가격일 때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어떤 가격에서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거래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사실상 가격 경쟁을 포기한 셈이다.

통상 인수전에서는 끝까지 버티며 승리한 기업이 강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번 거래를 바라보는 시장의 평가는 정반대에 가깝다. 오히려 넷플릭스가 변화한 미디어 시장 환경에 맞춰 보다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넷플릭스는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하자 빠르게 손을 뗐고, 파라마운트는 점점 더 많은 비용과 조건을 얹으며 거래 성사 자체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인수전은 두 기업이 콘텐츠 산업을 바라보는 방식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넷플릭스는 콘텐츠를 플랫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HBO나 워너브라더스 같은 프리미엄 IP 역시 매력적인 자산이지만, 핵심은 '얼마의 비용을 써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가입자를 늘릴 수 있는가'에 있다. 일정 가격을 넘어가면 과감히 거래를 포기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넷플릭스가 시행하고 있는 광고 요금제 확대와 계정 공유 제한, 가입자 유입 효과가 큰 일부 스포츠·라이브 콘텐츠 중심 투자 등 수익성 강화 전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발표한 250억달러 규모 자사주 매입 역시 외형 확장보다 자본 효율성과 재무 안정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콘텐츠 제작비 상승과 경쟁 심화 속에서 무리한 인수 경쟁 대신 재무적 유연성을 택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제공=각 사

반면 파라마운트는 전통 미디어 기업의 방식으로 접근했다. 콘텐츠를 단순히 플랫폼 가입자를 늘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화·방송채널·케이블·광고·스트리밍까지 연결되는 핵심 자산으로 판단했다.

HBO와 워너브라더스, CNN 같은 브랜드를 확보하면 영화와 드라마 제작은 물론 광고 판매, 글로벌 배급, 케이블 채널 운영까지 사업 전반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WBD를 통째로 인수해 몸집을 키우고, 여러 미디어 사업을 묶어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시장 환경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이다. 전통 미디어 산업은 이미 구조적 침체 압박을 받고 있다. 케이블TV 가입자는 계속 감소하고 있고, 광고 시장 성장세도 둔화됐다. 스트리밍은 가입자 경쟁이 치열해졌지만, 수익성 개선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디즈니, WBD 등 주요 전통 미디어 기업들이 높은 부채 부담 속에서 구조조정과 비용 절감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라마운트는 오히려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됐다. 우선 인수 규모 자체가 막대하다. 여기에 규제 리스크도 남아 있다. 미국과 유럽 규제 당국은 콘텐츠와 방송·스트리밍 자산이 한 회사에 과도하게 집중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이번 거래를 면밀히 들여다보겠다고 밝힌 상태다. CNN 같은 뉴스 자산이 엘리슨 일가 영향권 아래 들어갈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정치적 논란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 의원들은 최근 공개 서한을 통해 "거래가 규제 심사를 거의 받지 않을 것처럼 언급되는 데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파라마운트는 "규제 당국과 적극 협력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승인 절차가 길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WBD의 재무 상황 역시 변수다. WBD는 최근 1분기 실적에서 약 29억달러 순손실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넷플릭스 계약 해지에 따른 28억달러 규모 위약금이 반영된 영향이다. 총부채도 약 334억달러 수준에 달한다. 거래가 최종 완료되기도 전에 파라마운트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 예상보다 훨씬 커졌다.

아이러니한 건 넷플릭스가 인수전에서는 패배했음에도 시장에서는 오히려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JP모건은 넷플릭스가 이번 인수전에서 철수한 뒤 "현금과 유연성, 리스크 감소 효과를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넷플릭스는 비싸진 순간 계산기를 닫았고, 파라마운트는 살아남기 위해 더 큰 베팅을 택했다는 것.

결국 이번 인수전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는 콘텐츠 산업의 달라진 현실을 보여준다. 이제 시장은 단순한 몸집보다 재무 체력과 수익화 능력을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이번 WBD 인수전이 변화한 미디어 산업의 생존 방식을 보여준 사례로 읽히는 이유다.

이해정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