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으로 냉장고를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가정의 달 5월, 여기서 ‘가정’은 무엇일까? 흔히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혼인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조건에 충족하지 못하면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걸까? 혹은 생계나 주거를 함께하는 생활 단위가 아니어도, 서로를 돌보고 일상을 나누는 관계들 또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국가를 거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해결되길 바란다면, ‘무엇으로 만들어진 가정’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가정’인지, 즉 어떤 돌봄과 일상을 주고 받는 관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설연휴에 ‘예비 할머니 모임’이 함께한 ‘만두 김장’을 통해 우리가 상상한 노후의 생활공동체 한 장면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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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설연휴에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어느 공동체주택 주방에 모여 ‘만두 김장’을 함께 했다. 만두소를 만드는 칼질 시간.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 |
왜 하필 만두 김장이냐면
2025년 단기 프로젝트로 시작된 ‘예비 할머니 모임’은 올해도 이어졌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노후를 고민하는 젊은 세대들의 관계 네트워크가 너무 아쉽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함께 생활공동체를 탐구하는 동안, 생활공동체라는 것이 대단한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맺는 절대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가족처럼. 시간과 공간, 관계가 이어질 때 생활공동체도 실체를 가진다. 관계는 시간을 들여 함께 일상을 나눠야 비로소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종종 예비 할머니 모임이 ‘생활공동체 양성소’가 되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한다. 각자의 생활공동체를 꾸리고 이 모임에서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현재 우리 모임에는 자신의 생활공동체를 구체적인 미래로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체력을 쌓는 예비 할머니부터, 이미 생활공동체를 시작한 예비 할머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예비 할머니들이 있다. 올해 우리의 목표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장기적으로 관계 맺는 시간’ 갖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생활공동체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한 동네에 산다면 어떤 일상을 살게 될까? 상상컨대, 자주 함께 밥을 차려 먹고, 종종 심야영화를 보러 가며, 별일 없이 만나 산책하는, 평범하면서도 어쩌면 비범한 삶을 꿈꾼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도시 노동자이자 세입자로 살며 필연적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원대한 목표다. 우리는 이 상상력을 일부 실행에 옮기며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낙관하고 싶었다. 그러다 꺼낸 이야기가 친구들과 만두를 빚는 일이었고, 또 누군가는 대용량의 요리를 김장에 빗대어 말하며, 결국 ‘만두 김장’을 하게 됐다.
일종의 ‘가족극’
설연휴 마지막 날, 우리는 서울 서부권에 위치한 어느 공동체주택의 공유 주방에 모였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6인용 식탁은 아홉 명의 예비 할머니들이 가져온 도마들로 가득 찼다. 여섯 명이 부추와 버섯을 칼질하면, 자리가 없는 두 명은 다 채워진 그릇을 비우고 쓰레기를 치우거나 두부의 물을 짰다.
키라라의 전자음악과 함께 끊이지 않는 칼질 리듬은 만두소를 산처럼 쌓았고, 그만큼의 이야기도 쌓였다. 각자의 집에서 듣는 명절 잔소리를 나누기도 하고, 나중에 우리가 생활공동체를 하게 되면 1년에 몇 번의 명절을 치루고 싶은지, 어떤 음식을 만들고 싶은지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만들어진 2백여 개의 만두 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구워 먹고, 각자 가져온 용기에 야무지게 담기도 했다. 그러고도 만두소가 남아서 밥을 볶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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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만두 빚기 시작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 |
돌이켜보면 으레 명절 풍경이란, 온갖 애들이 들러붙어 밀가루 반죽 놀이를 하고 그래도 좀 머리 큰 애들이 만두 같은 걸 빚어 보려고 만지작대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어떤 어른은 칭찬이랍시고 있지도 않은 미래의 딸래미 얼평(‘예쁜 딸 낳겠네!’ 등)을 하곤 했다.
반면, 이곳에서는 칼질의 침착함이나 썰린 재료의 단정함, 노동에의 몰입도 같은 것에 대한 칭찬만이 오갔다. 다양한 모양의 만두가 나오니 새로운 요리도 시도할 수 있었고, 서로의 만두 빚는 모양을 알려주고 배웠다. 여기에는 잘함과 못함이 아닌 다름만이 있었다. 30대 미‧비혼율 50% 시대, 그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들이 만드는 명절은 다정함 뿐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부장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명절날 여성들이 부엌에 북적이는 것이 낯선 일이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만두 김장을 함께 하며 가족의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정상가족’이라는 경계는 다양한 생활공동체의 존재와 가능성을 가린다. 중요한 건 혈연이나 결혼 여부가 아니라 ‘함께하는 일상’이다. 만두 김장은 일종의 가족극을 통한 역할의 재구성인 것이다.
예비 할머니 모임이 노후에 대한 불안을 다루는 방법
많은 사람들이 저축이나 결혼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준비하는 노후는 결혼 외의 방식으로 가족을 일구며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재밌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꾀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현재의 불안을 다루고자 했다.
지난 번 모임에서 우리는 60대의 구체적인 하루를 상상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나이가 들었을 때 어떤 일과를 보내며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지, 60대의 내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하루를 그려보고,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해 현재의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눴다. 60대가 되어서도 계속 일하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은퇴하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다양한 문화센터들을 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운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으며, 하루의 한 조각에는 꼭 친구들과의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관계와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이어진 ‘노후의 일과를 현실화하기 위한 지금의 실천’을 떠올리는 것은 다소 막막했으나, 상상한 일과 중에서도 ‘중요하다 여기는 부분을 지키기 위한 실천’으로 조금 더 구체화하니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실 많은 부분 ‘돈을 많이 벌어둬야 한다’로 퉁쳐질 지 모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노후를 준비한다. 하지만, 퉁쳐서 생각한 대안이 현재의 나를 잡아먹고 있진 않을까? 한 참여자는 “적다 보니 꼭 나이를 먹고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네요.”라고 말했고, 이후 운동 레슨을 등록했단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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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 모양부터 딤섬 모양까지 제각각 만두들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 |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건강한 노후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또 그런 현재의 구체적인 실천들이 모여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면 안심하고 현재를 즐기며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비슷한 생애주기적 역할을 요구받는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로 채찍질 당하며 헐레벌떡 사는 삶은 초조함을 불러오고, 시간에 쫓기는 선택은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 멈춰서서 고민해야 한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내 미래를 함께할 것인가.’
그것이 예비 할머니 모임에서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사회가 결혼을 통해 가족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그 틀 안에서 미래를 설계토록 한다면, 그 밖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이것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둬서 돌봄을 외주하는 문제를 넘어선 고민이다.
우리는 생활공동체를 공부하며 가족을 고민한다. 식구라고 불리는 밥을 먹는 공동체, 두 사람의 로맨스에서 시작된 경제 공동체, 혈연이나 입양으로 연결된 법적 의미의 가족까지. 그 의미나 실체를 뜯어보고 파헤쳐가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가족의 상을 그린다. 우리는 피를 나누지도 않고 같이 살지 않더라도 근거리에서 서로를 돌보는 우정 공동체를 가족으로 부르고 싶었다. 그것을 왜 가족이라고 불러야 하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왜 그렇게 부르지 못하는지 되묻고 싶은 것이다. ‘정상가족’만 가족으로 고집하는 사회는 수많은 결핍을 낳고 있지 않은가.
급할 건 없다: 미래를 작당모의하는 예비 할머니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정착하고 싶어하고, 그 중 가장 견고한 울타리를 가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비 할머니 모임’ 안에서 가족의 확장을 고민하며 서로가 견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고, 팀 활동을 통해 다양한 사례들을 만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네트워크를 재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한 모임원은 이 모임의 참여동기를 미래의 하우스메이트를 찾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 할머니 모임’은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이곳에서 만나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어떤 가족을 만들었는지, 그 삶이 순탄하게 이어지고 있는지 같은 시행착오들이 듣고 싶어진다. 언제까지고 ‘정상성’에 밀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을까? 아니면 우리끼리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세상의 풍파같은 건 느낄 새도 없다고 얘기하게 될까? 그렇게 가끔 모여서 사는 이야기도 좀 하고, 생활공동체도 회사의 가족휴가를 쓸 순 없을지 궁리도 하며 꾸준히 작당모의할 수 있는 미래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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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만두를 담아 인증샷 (사진 출처-예비할머니모임) |
일찌감치 노후를 준비하며 배우는 것은,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운동은 평생 해야 하는 거니까 나에게 맞는 운동을 찾기까지 끊임없는 시도를 할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이 성애적 관계로 맺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탐색하며 가족으로 섭외해 볼 수도 있다. 생활공동체가 모여 살 마을을 찾아나선다는 명목으로 자유로이 여행 다니는 것도 빠질 수 없겠다. 타임어택 같았던 삶에서 튕겨져 나오니 세상엔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다. 시간적 여유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온다. 여기, 시간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은 서로를 기다려줄 수 있다. 우리는 장기적 전망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고,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집에 돌아와 함께 만든 만두를 서로 겹쳐지지 않도록 예쁘게 펼쳐 냉동실에 넣었다. 우리의 활동이 유형의 결과물로 나와 일용할 양식이 됐다. 김할머니가 만든 냉이반찬, 박할머니가 만든 봄동샐러드가 냉장고를 채우고,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함께 두쫀쿠 김장을 하는 미래가 상상됐다. 우정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필자 소개] 콩쥐야: 알 수 없는 미래에 혼자 벌벌 떨다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헤쳐나가기로 함. 현재 생활공동체를 실험 및 공부하고 있으며 이후 ‘생활공동체 연대체’ 설립을 꿈꾸는 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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