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788] 당구에서 ‘비껴치기’를 왜 ‘기리까시’라고 말할까

김학수 2026. 5. 19.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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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도로가 막히면 우회도로로 돌아가는 것은 운전자의 상식이다.

당구장에서 비껴치기를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기리까시(기리카시)'는 사실 일본식 당구 용어의 흔적이다.

지금은 세대가 바뀌며 비껴치기라는 순우리말 표현을 더 많이 쓰지만, 오래된 당구장에서는 여전히 "기리까시 한 번 가자"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어쩌면 기리까시는 단순한 당구 용어가 아니라, 한국 당구 문화의 살아 있는 방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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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방법을 고민하는 여자프로당구 이미래
직선도로가 막히면 우회도로로 돌아가는 것은 운전자의 상식이다. 당구도 비슷하다. 정면으로만 치면 갈 수 있는 길이 너무 제한된다. 비껴쳐야 비로소 공의 각도와 움직임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다. 당구에서 ‘비껴치기’는 단순한 “묘기”가 아니라, 경기 전체를 풀어가는 핵심 기술이다. 두 목적구를 동시에 맞히기 위해서다. 특히 3쿠션에서는 수구가 여러 쿠션을 돌며 정확한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단순 직선 타격만으로는 각이 나오지 않는다. 비껴치기를 하면 수구에 옆회전과 새로운 진행각이 생겨, 막혀 있던 길이 열린다. (본 코너 1777회 ‘당구에서 왜 ‘큐볼’이라 말할까‘, 1778회 ’당구에서 왜 영어 ‘object ball’을 ‘적구(的球)’라고 말할까‘ 참조)

당구장에서 비껴치기를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는 ‘기리까시(기리카시)’는 사실 일본식 당구 용어의 흔적이다. 지금은 세대가 바뀌며 비껴치기라는 순우리말 표현을 더 많이 쓰지만, 오래된 당구장에서는 여전히 “기리까시 한 번 가자”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말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한국 당구 문화가 어떤 시대를 지나왔는지까지 자연스럽게 보인다.

기리까시는 일본어 ‘切り返し(きりかえし)’ 또는 ‘切り返す’ 계열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원래 뜻은 방향을 꺾거나 되돌린다는 의미인데, 당구에서는 공의 진행 방향을 비틀어 비껴 보내는 느낌과 맞물려 사용된 것이다. 일본식 발음이 한국식으로 변하면서 ‘기리카에시’가 기리까시처럼 굳어졌다는 해석이다.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대체로 1960~1980년대 한국 당구장 문화가 급성장하던 시기로 추정된다.

사실 한국 당구 용어에는 일본식 표현이 유난히 많다. ‘시네루(회전)’, ‘다마(공)’, ‘당구대(다이)’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해방 이전과 이후까지 이어진 일본식 체육·오락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당구는 근대 도시문화와 함께 퍼졌고, 기술 용어 상당수가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영어 원어보다 일본식 음차가 먼저 현장에 정착한 셈이다. (본 코너 1779회 ‘왜 아직도 '당구공'을 ‘다마’라고 부를까‘, 1780회 ’왜 ‘당구대’를 ‘다이’라고 부를까‘, 1787회 ’당구에서 왜 ‘회전’을 ‘시네루’라고 말할까‘ 참조)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일본식 용어들이 단순 번역을 넘어, 한국 당구장의 정서까지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비껴치기라고 하면 기술 설명에 가깝지만, 기리까시라고 하면 왠지 허세와 감각이 섞인 당구장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난다. 마치 오래된 당구장 형광등 아래에서 고수들이 큐를 닦으며 한마디 던지는 느낌이다. 언어는 단지 의미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공기와 세대의 기억까지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에는 순화 움직임도 뚜렷하다. 대한당구연맹과 생활체육 현장에서는 가능한 우리말 표현을 권장한다. 스포츠 용어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실제로 젊은 세대나 입문자들은 일본식 용어보다 한국어 표현을 더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기리까시라는 단어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시간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당구장의 담배 냄새, 큐 끝에 묻은 초크 가루, 그리고 한 시대 남자들의 사교 문화까지 함께 들어 있다. 어쩌면 기리까시는 단순한 당구 용어가 아니라, 한국 당구 문화의 살아 있는 방언인지도 모른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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