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시장 망치는 무원칙 에너지 정책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에너지 가격 결정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점점 당연한 풍경이 되고 있다. 최근 산업통상부는 5차 석유 최고 가격을 또다시 동결했다. 세 번 연속 동결인 가운데, 누적 인상 요인은 휘발유 200원, 경유 400원, 등유 600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민생 안정과 물가 관리를 명분으로 시장의 가격 신호를 억눌렀다. “2주마다 국제 가격 변동을 반영해 최고 가격을 조정하겠다”는 설명은 대체 왜 한 걸까.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분을 분기별로 전기요금에 반영하겠다며 2021년 1분기부터 시행 중인 ‘연료비 조정 단가’ 제도 역시 무력화된 상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올라간 국제 연료비가 낮아져 한국전력은 올해 2분기 전기 요금을 kWh(킬로와트시)당 11.2원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후에너지환경부는 한전에 ‘현상 유지’를 지시했다. 4년 전 연료비 급등기 때 전기료를 억제한 탓에 천문학적 부채가 쌓여 있어 이를 메워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 번 스텝이 꼬이니 올려야 할 때도 못 올리고, 내려야 할 때도 못 내리는 엇박자가 반복된다.
SK가스, E1 등이 수입해 오는 LPG(액화석유가스) 국제 가격은 3월에서 4월 사이 50%가량 치솟았다. 하지만 이 기업들은 5월 LPG 가격을 누적된 미인상 분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에서 올렸다. ‘LPG는 택시나 가정에서 쓰는 서민 연료란 사실을 잊지 말라’는 정부 압박 탓이다. LPG 업계 관계자는 “기업도 고통 분담에 동참하고 있으나, 수익성 악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푸념한다. 한국가스공사 미수금은 4년 전 2000억원 미만에서 어느덧 13조3000억원으로 67배 폭증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가격 왜곡이 국민의 소비 행태까지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은 ‘소비를 줄이라’는 시장의 강력한 경고다. 그러나 정부는 인위적 개입으로 이 경고음을 소거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여름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에어컨을 틀거나 겨울철 실내에서 반소매를 입고 난방을 돌리는 에너지 과소비 문화가 뿌리내렸다. 가격 신호가 사라지니 자원 빈국인데도 모두가 에너지를 펑펑 쓴다. 서민 보호를 명분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을 일괄 억제하고 있지만, 그 혜택의 상당 부분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보다 대형 세단을 타는 고소득층에게 돌아가는 ‘역진적 분배’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민생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칙을 아예 무시한 채 정권의 정무적 판단만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가 굳어져선 안 된다. 정부는 에너지 가격의 시장 연동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안보 역시 시장의 경고를 수용하고 가격 정상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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