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는 5ㆍ18 ] ⑦한강 '소년이 온다' 고문 장면은 '진실'이었다

이건상 기자 2026. 5. 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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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대 영창 수감자들이 기억하는 소설과 현장
볼펜 고문,· 곤봉 손등치기, 불개미 물리기 자행
극도의 배고픔 속 2인 1조 식사로 구금자 이간질
1980년 5월~8월 사이 상무대 영창은 지옥과 다름 없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철장을 붙잡는 일명 매미 고문을 비롯해 곤봉으로 손등을 내리치는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건상 기자

노벨문학상 수상작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독자들은 소설 속 장면들에 진저리 친다. '비가 올 것 같아'로 시작되는 소설은 5·18 당시 시신 안치소였던 상무관를 세밀하고 밀도있게 그리고 있다. 상무관 공기의 냄새까지도 담아냈다.

독자들은 작가만큼의 고통스러움을 안고 이 소설을 읽어나간다. 하지만 일부 섬뜩한 장면에서는 '허구'가 아닐까라는 자문에 빠지기도 한다. 소설 장면은 작가의 상상에 기반한 픽션일까 아니면, 현장의 날것 그대로의 표현일까.

5·18 항쟁에 참가했던 이들은 '소년이 온다'가 처철하리만큼 팩트(사실)라고 말한다. 소설 속 장면과 5·18 유공자들의 증언을 교차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 상무대 영창 볼펜 고문

소년인 온다
평범한 볼펜이었습니다. 모나미 검정 볼펜. 그걸 손가락 사이에 교차시켜 끼우게 했습니다. 그야 왼손이죠. 오른손으론 조서를 써야 하니까. 예, 그렇게 비틀었습니다. 이 방향으로도 이렇게. 처음엔 견딜 만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같은 곳에 그렇게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어요. 피와 진물이 섞여 흘렀습니다. 나중엔 이자리에 하얀 뼈가 들여다 보였습니다. 뼈가 드러나니까 알코올에 적신 약솜을 끼워주더군요. (중략) 뼈가 드러났으니 그 자리는 이제 그만할 거라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걸 알고, 약솜을 뺀 다음 더 깊게 볼펜을 끼우고 짓이겼습니다. (4장 쇠와 피 104~105쪽)

5·18 증언 고 김향득 (당시 대동고 3년)
빨갱이 새끼라고 하면서 볼펜 이런 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가지고 손을 짓이겨 버리고 그랬는데, 그러믄 손이 퉁퉁 붓어. 살려달라고 울며 불며 빌었제. 거기선 어떤 힘 좋은 장사도 못 버텨. 헌병들한테 맞는 것이 제일 아팠어요. (중략) 복창소리가 군대식으로 커야 되는데 안 크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라고 해 가지고 곤봉으로 (손등을) 다섯 대씩 맞아 버리면 진짜 아닌게 아니라 거의 앞이 안 보여버려요. 앞이 안보여.('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책자 증언)

작가는 볼펜 한 자루를 통해 계엄군의 폭력성, 나아가 국가폭력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볼펜 한 자루가 고문의 도구였다는 문장은 쉬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5·18기록자로 최근 숨진 김향득 열사는 볼펜 고문에 대해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김 열사는 생전에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책자 증언을 통해 상무대 영창 내에서 얼마나 폭력이 자행됐는지 보여주었다. 영창에 구금됐던 수많은 유공자들은 헌병들이 감방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불러내 곤봉으로 손등을 내리쳤다고 회고한다. 박남선 상황실장 등 도청 항쟁지도부들은 잠 안 재우기, 구타, 물 먹이기, 통닭구이, 전기 고문 등을 받아 한번 나갔다 오면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광주 5·18 자유공원 내 재현된 상무대 법정 영창. 당시 계엄당국은 2인 1조 식판 식사 규정을 만들어 항쟁 참가자들간 이간질을 자행하려 했다. / 이건상 기자

#상무대 영창의 식판

소년이 온다
그곳의 한 끼 식사는 식판에 담긴 밥 한 줌과 국 반 그릇, 김치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2인 1조로 나눠 먹었습니다. 김진수와 한조가 되었을 때, 서서히 혼이 빨려나간 짐승과 같은 상태였던 나는 안도했습니다. 그는 많이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얼굴이 창백하고 눈언저리는 병자처럼 어두웠으니까요. 두 눈은 생기도 표정도 없이 공허하게 번쩍였으니까요. (4장 쇠와 피 107쪽)

5·18 증언 최치수 (당시 살레시오고 3년)
영창에서의 식사는 참으로 비참했다. 군용 식기 1개에 한 주먹씩 밥을 퍼주고 거기에 국물을 살짝 부어주면 그걸 두사람이 양쪽에 앉아서 떠먹었다. 어떤 사람은 밥이 많이 들어 있고, 어떤 사람은 적게 들어있곤 했다. 그러면 밥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몇 숟갈 떠서 나눠주기도 했다.

경창수(당시 동신고 3년)
식사가 나왔는데, 식판 국물 넣는 곳에 밑바닥에 깔릴 만큼 된장 국물을 붓고, 바닥에 꽁보리밥 한 자락이 깔려 나왔다. 하루 종일 굶어서 먹기는 먹었는데 그 조차도 안먹는 사람이 있어 눈치가 보였다.

고 김향득 (당시 대동고 3년)
시디신 김치 한 가닥에 짜디짠 국물에 눈꼽 만큼 주는 밥은 한창 나이의 청년들에게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겠냐며 자신의 밥을 덜어주는 이들도 있었다. ('5월, 새벽을 지킨 소년들 '책자 증언)

하루 종일 심문과 고문에 탈진한 영창 구금자들은 군대 식판에 배급하는 식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하지만 계엄 당국은 2명이 1개 식판을 사용하도록 조치했다. 밥을 먹다 보면 누군가 조금이라도 더 먹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도 더 먹으려하게 된다.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굶주림에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갈등의 출발이 된다. 전두환 신군부는 밥으로 항쟁 주역을 이간질 시키려 했다. 하지만 소설 속 우려와 달리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밥을 덜어주는 아름다운 동지애,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1980년 당시 광주시 치평동 상무대 영창. 영창 입구 작은 연병장에서 불개미 고문이 자행됐다. 5.18 기념재단 제공

#악랄한 불개미 고문

소년이 온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쇠와 피 109쪽)
 

5·18 증언 박남선 상황실장
자신들이 의도하는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옷을 완전히 벗긴채 불개미가 있는 구덩이로 끌고 가 엎드리게 하고는 불개미에게 물어 뜯기게 하는 고문을 자행했다. 불개미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서는 동지들에게는 가차없이 몽둥이가 무수히 날아들었다. (박남선 항쟁지도부 상황실장 '오월 그날' 111쪽)

상무대 영창에서는 인간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망가뜨리는 고문이 자행됐다. 그 중 소설에 굵은 개미들에게 물어 뜯기게 하는 고문 장면이 나온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지만, 이 불개미고문의 트라우마는 수십년을 고통에 빠지게 했다고 한다. 매일 밤 벌레에 물리는 악몽에 상당수가 정신질환을 앓았다.

소설 속 장면과 동일한 증언이 도청 항쟁지도부였던 박남선 상황실장의 수기 '오월 그날' 111쪽에 나온다. 박 상황실장은 "담당수사관은 서울말을 쓰는 신재식이란 자와 경상도 말을 하는 김준곤이란 자였는데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이름"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8일 광주 옛 전남도청 시민군 상황실 재현공간에서 5·18 당시 마지막 새벽 방송을 했던 박영순 씨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새벽 최후 방송

소년이 온다
시민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 주십시요.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중략) 마침내 그 소리들이 지나가자 다시 가두방송이 들렸다. 도심의 침묵을 가로질러 여러 블록 너머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여러분, 지금 나와 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3장 일곱개의 뺨 91~92쪽)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사십여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 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 주세요, 여러분. (5장 밤의 눈동자 169쪽)

5·18 증언 박영순 (당시 대학2년)
갑자기 방송실 문이 확 열리더니 김종배가 "계엄군이 포위했다. 급하다 빨리 방송하라"면서 A4용지 절반 보다 약간 작은 메모지에 방송 내용을 적어주었다. '이제 죽는 구나' 생각되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옥외 방송 스위치를 올려야 하는데 머뭇거리자 이흥철이 손을 잡아 같이 스위치를 올리고 볼륨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학생들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형제자매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끝까지 도청을사수 할 것입니다." 죽음이 실감 나 떨리고 울먹인 채 3번을 반복했다. 더 이상 목이 메어서 할 수 없었다. ('광주민중항쟁과 여성' 증언집)
 

27일 새벽 광주 도심을 울렸던 방송이었다. 전남도청, 전남대병원, 충장로 일대 주민들은 애절한 목소리로 울부짖던 여학생을 잊지 못한다. 당시 충장로에 살았던 김영주(당시 중3)씨는 " 그날 새벽에 여자 목소리의 방송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면서 "온가족이 방송을 들었지만 도저히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었고, 얼마 뒤 총소리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방송의 주인공은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박영순씨. 그는 도청 1층 상황실 옆 방송실에서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마지막 방송을 했다. 이후 도청에서 체포돼 40일 동안 합동수사본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조사 때 매일 도청 방송멘트를 적어야 했기 때문에 결코 잊어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