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이후 10년, 수많은 ‘강남역 사건’의 반복이었다 [플랫]

2016년 5월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의 공중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34세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가해자 김성민은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6명을 그대로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자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에 붙잡힌 그는 “평소 여성들에게 무시당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직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 포스트잇 수 천장이 붙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문장들이 벽을 메웠다.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신예은씨(33)는 노란색 포스트잇에 문장을 천천히 써내려갔다. 여러 번 머뭇거리며 문장을 고쳐 쓴 그는 포스트잇을 들고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섰다. 10년 전에도 신씨는 이곳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국화꽃 한 송이를 두고 갔다. 다시 찾은 강남역에서 그는 자신이 붙인 포스트잇 문장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때 포스트잇을 붙인 시민들은 지난 10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 중 10명을 다시 만나 ‘강남역 이후’에 대해 물었다. 그날의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 곳곳이 여성들에게 강남역 10번 출구와 다르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2016년 5월21일 고등학생이던 김아연씨(27)는 보충 자율학습을 빠지고 대전에서 강남역으로 향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추모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SNS로 접한 직후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강남역에 다다르자 겁이 났다. 혼자 온 10대 여성인 자신을 누군가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 회원 등이 추모하러 온 시민들을 공격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김씨는 역 부근을 떠돌다 저녁이 돼서야 포스트잇을 붙였다.
김씨가 그날 느낀 “이상한 공포감”을 다시 떠올린 건 성인이 된 이후였다. 늦은 밤 귀갓길을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문득 공포로 다가왔다. 김씨는 여자 선배와 친구들이 늦은 밤 술자리를 마치고 귀가할 때마다 택시 차량번호를 공유하던 일과 함께 강남역에서 읽은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김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남역 사건 이후 처음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동주씨(31)도 비슷한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뉴스를 접했을 때 박씨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피해자가) 술을 많이 마시고 늦게까지 놀았겠지”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다. 그래야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해자가 여성이 나타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고 박씨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너무 무섭고 서러웠어요.” 박씨는 추모 현장을 찾아 ‘미안하다’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였다. 우연히 살아남았고 ‘당신이 나일 수도 있었다’는 미안함이었다.
여전히 “여자라서 죽는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포스트잇의 ‘여자라서 죽었다’ 문구는 지난 10년 간 여성이 살해될 때마다 환기됐다. 최모씨(41)도 그 문장을 기억했다. 그에게 2016년 5월17일은 “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다. 남성인 최씨에게 이 사건은 “여성이라는 이유 외엔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는 그날 이후 3년 간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폭력 사건들을 개인 블로그에 기록했다. 불법 촬영, 스토킹, ‘n번방’ 사건,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 등 여성 대상 범죄는 반복됐고 “부조리한 죽음”도 이어졌다. 최씨는 이에 대해 “단순 개별 범죄가 아니라 여성을 향한 테러로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아람씨(33)는 강남역 사건 발생 1년 전 수원역에서 4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납치·살해한 사건을 기억했다. 뉴스에는 “피해자가 술 마신 것이 문제”라는 댓글이 달렸다. 양씨는 “여전히 누군가 죽고 사라져도 끝내 대상화되거나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사회”라며 “지난 10년 동안 여성 피해 사건들을 접하며 깊은 우울을 겪었다”고 말했다. 양씨 자신도 지난해 교제폭력을 경험했다. 그는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 혐오 범죄를 가시화하고 고백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며 “더 많은 이야기와 기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엔 광주에서 여성 청소년이 일면식 없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시민들은 이 모든 사건을 수많은 ‘강남역’으로 기억했다. 30대 여성 A씨는 “제대로 대응했다면 죽지 않았을 여성들이 너무 많다”며 “한국은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강남역 사건이 반복된 사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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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겠습니다”란 약속

강남역 10번 출구는 비극을 상징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애도와 연대를 보여준 공간이었다. 시민들에게도 지난 10년은 비극이 반복됐지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버텨온 시간이었다.
김연웅씨(31)는 포스트잇이 빽빽한 강남역 10번 출구를 마주했을 때의 떨림을 기억한다. “포스트잇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던 연웅씨는 포스트잇을 붙인 이들과 추모·분노를 “함께 공명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 뜨거운 에너지가 ‘페미니즘 리부트(대중화)’로 이어졌고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생겼다”며 “지난 10년은 그들과 함께 싸워온 시간”이라고 말했다. 연웅씨는 현재 시민단체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과 남다른성교육연구소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활동가가 되지 않았더라도 시민들은 각자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갔다. 김동연씨(33)는 강남역 사건 이후 모르는 여성들에게도 애틋함을 느낀다. “나도 모르는 여성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라는 감각이다. 김씨는 여성 의제를 다루는 시위에 참여하고 직장에서 여성 혐오적 상황을 마주하면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조연지씨(28)는 지난 10년을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과 상처를 회복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했다. 그는 2022년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김진주씨가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삶을 재건해나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조씨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위축되지 말자고 다짐했다”며 “영원히 망가진 삶은 없도록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피해 이후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다음
이연지씨(41)는 2016년 5월21일 수많은 포스트잇이 늘어진 강남역 10번 출구 모습을 “무수한 사람들이 손잡아 피워낸 꽃”처럼 느꼈다. 그날 현장에 켜진 촛불들이 서로 이어져 슬픔과 따뜻함을 자아냈다고 회상했다. 그날 이씨는 신동엽 시인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포스트잇에 써붙였다. 이씨에게 10년은 “아무도 하늘을 보지 못했지만 두 눈 부릅뜨고 울면서 나아가는” 시간이었다. 이씨는 이 사건 이후로 페미니스트로서 ‘언니차프로젝트’(언니차)에서 활동하며 여성 관련 여러 사건에서 연대 활동을 하고 있다.
10년 전 포스트잇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적은 시민들은 10년이 지난 지금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행동하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싸우겠습니다.” 신예은씨는 “강남역 10번 출구는 피해를 보고, 싸우고, 애도하는 여성들의 공간 같아요.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또 싸우죠. 그 슬픔은 개인이 아닌 모두의 슬픔이에요.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신씨는 이러한 다짐을 담은 노란색 포스트잇을 지난 16일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였다.
▼ 우혜림 기자 saha@khan.kr · 김은송 기자 ssong@khan.kr · 임주영 기자zoo@khan.kr ·하주언 기자 eon@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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