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62> 정도를 지키는 법관과 가혹한 형리(刑吏)] 참 법관은 사악한 무리에 대항해 공평함을 지키고 굽히지 않는다

홍광훈 문화평론가 2026. 5. 18.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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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전기의 측천무후 집권 시절 사법 수장 대리경(大理卿)으로서 법관의 귀감이 된 서유공. /사진 바이두
홍광훈 문화평론가 -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당(唐) 전기의 서유공(徐有功·640~702)은 평생 정도를 지킨 법관으로서 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본명은 서홍민(徐弘敏)이나 효경(孝敬)황제로 추존된 이홍(李弘)의 이름을 피해 보통 자(字)로 불린다고 ‘신당서(新唐書)’ 열전의 서두에 적혀 있다. 그는 엄혹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의 공포정치 시절, 권력에 굴종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오직 정의에 입각한 양심과 법리에 따라서 일관되게 행동했다.

집권 초기 신하의 불복을 염려한 무후는 밀고 제도를 만들어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가차 없이 탄압했다. 걸핏하면 모반이니 내란이니 하며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 과정에서 모함당해 억울한 참사를 당한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다수의 가혹한 형리가 동원됐다. 이른바 ‘혹리(酷吏)’다. 이 혹리는 무고한 사람도 없는 죄를 예사로 꾸며내 옭아매었다. 이런 공포 속에서 대소 관료는 보신에 급급해 모두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서유공은 이 비상시국에도 치열하게 소신을 관철해 나간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무후 타도의 기치를 내건 서경업(徐敬業)의 거병이 실패한 4년 뒤인 688년, 당의 종실 이정(李貞)과 이충(李沖) 부자가 모반죄로 처형됐다. 그 후 위주(魏州) 사람 풍경동(馮敬同)이 귀향현위(貴鄉縣尉) 안여경(顏餘慶)을 이충의 모반에 가담했다고 무고했다. 박주(博州) 출신 안여경이 박주의 자사(刺史)이던 이충과 서신 왕래를 하며 교류한 사실을 꼬투리 잡은 것이다. 이 일로 안여경은 혹리에게 넘겨져 고문 끝에 이충과 반란을 모의했다고 자백했다. 형법 담당관은 심의 결과, 안여경은 모반의 수괴(首魁)가 아닌 지당(支黨·예하조직)으로, 사형이아닌 유형(流刑)에 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시어사(侍御史) 위원충(魏元忠)이 수괴와 공모했으므로 지당으로 볼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이때 서유공이 아뢰었다. “모반 사건의 수괴가 처형된 이후에 조정은 사면령에서 지당으로서 당시 발각되지 않은 자는 죄를 용서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안여경은 사면령이 공포된 뒤에 고발당했으므로 지당에 속합니다. 악을 미워함은 비록 신하의 마음이나, 살림을 좋아함은 바로 성인의 덕입니다(嫉惡雖臣子之心, 好生乃聖人之德). 그런데 지금 사면 뒤에 거듭 죄를 가하니 사면이 없느니만 못하고, 살린 뒤에 다시 죽이니 살리지 않음만 못합니다. 거룩한 조정의 처사가 아니므로 안여경을 지당으로서 유형에 처하소서.” 이에 무후가 크게 노해 무엇을 수괴라 하느냐고 물었다. 서유공이 ‘수’는 수모자이며 ‘괴’는 우두머리라고 대답했다. 무후는 안여경이 어찌 수괴가 아니냐고 거듭 따지고, 서유공은 수괴라면 이충이 패할 당시 모두 함께 처형됐을 터이지만 사면령이 내린 후인 지금 일이 밝혀졌으므로 지당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박이 계속 이어졌다. 논리 정연한 서유공의 말에 무후의 노기는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주위에 있던 수백 명의 신하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떨었으나, 서유공은 표정조차 바뀌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모두 그 담력에 탄복했다.

공평함 지키며 1만 명 살린 서유공

당 중기의 두우(杜佑·735~812)는 ‘통전(通典)’에 법관으로서 정의롭고 강직한 면모를 보여준 서유공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책은 상고시대부터 당 중기까지의 종합적인 제도 변천사로서 저자가 30여 년에 걸쳐 저술했다.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예(禮)’ ‘악(樂)’ ‘병(兵)’ ‘형법(刑法)’ 및 ‘주군(州郡)’과 ‘변방(邊防)’의 9개 부문이다. 서유공의 행적은 ‘형법’ 제7권의 ‘수정(守正·정도를 지킴)’ 항목에 보인다.

책에 따르면, 서유공이 법관으로 활동하는 동안 600여 건의 사건을 다루면서 여러 차례 핍박과 탄핵을 당했지만, 언제나 강직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임해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독하게 법을 적용하는 형리와 무고를 일삼는 무리는 ‘시종 변함없으며 세태의 험난함과 평탄함에 한결같았던(始卒不渝, 險易如一)’ 그를 원수보다 더 미워했다.

두우는 서유공과 같은 법관은 고금을 통틀어 찾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전한의 장석지(張釋之)와 우정국(于定國)이나 후한의 진총(陳寵)과 곽궁(郭躬)처럼 대대로 칭송받는 법관도 서유공에게는 비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전한의 문제(文帝)와 선제(宣帝) 그리고 후한의 장제(章帝) 때 각각 활약한 네 사람은 모두 현군을 만나 제 소신을 무난히 펼칠 수 있었으나, 서유공은 가장 혹독한 시절의 법관임에도 옛사람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장석지와 우정국은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해당 열전에 각각 실렸으며, 진총과 곽궁의 행적은 ‘후한서(後漢書)’의 ‘곽진열전(郭陳列傳)’에 함께 기록됐다. 이와 같이 정의롭고 강직한 법 집행으로 용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면서 서유공이 살린 사람은 1만 명을 헤아렸다.

‘구당서(舊唐書)’ 열전에서 사관은 이렇게 평했다. “무후가 권력을 훔치고 혹리가 죄를 뒤집어씌울 때 서유공은 혼자서 사악한 무리에 대항해 공평함을 지키며 굽히지 않았으니(獨抗群邪, 持平不撓),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장석지와 우정국 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 구양수(歐陽修)도 ‘신당서’에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서유공은 당과 무후의 주(周) 정권에서 두 마음을 갖지 않고 오직 일관되게 법을 집행해, 죽음을 무릅쓰고 죽어가는 사람을 구했다(身蹈死以救人之死). 의심 많은 무후와 혹리 사이에서 너그러움으로 자신을 독려한 끝에 안으로 모진 학대의 화염을 진압해 천하가 불길 속에 말려들지 않도록 했으므로,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정국과 장석지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혹리로 오명 남긴 내준신과 주흥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로 이름난 남송(南宋) 초기의 시인 왕십붕(王十朋·1112~71)은 110수로 된 ‘영사시(詠史詩)’의 마지막 편에서 특별히 서유공을 기렸다. “혹리가 옥사를 일으켜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옭아맬 때, 공 또한 몇 차례나 호랑이 입에 걸려 다칠 뻔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해 많은 사람이 죽음을 면했으니, 그 공적 논함에 어찌 전한의 우정국과 장석지에 그치랴(獄興羅織陷忠良, 公亦幾遭虎口傷. 蹈死救人人免死, 論功何止漢于張)?”

서유공의 반대편에 서서 길이 추한 이름을 남긴 혹리의 대표 인물로 내준신(來俊臣)과 주흥(周興)을 꼽는다. ‘통전’의 ‘형법’ 제8권 ‘준혹(峻酷)’ 항목에는 이 둘을 비롯해 23명이 거명됐다. 그 내용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혹리열전’에 옮겨져 있다. 이 혹리는 밀고자 수백 명과 함께 죄명을 엮어 선량한 사람을 모함했다. 그 올가미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내준신은 ‘고밀나직경(告密羅織經)’ 1권을 지어 밀고해 죄를 덮어씌우는 지침서로 삼았다. ‘나직’은 과거 사람의 경험을 망라해서 죄상을 꾸며낸다(網羅前人, 織成反狀)는 뜻이라고 두우가 풀이했다. 내준신은 죄수를 심문할 때 경중을 따지지 않고 식초를 코에 부어 넣거나 땅굴 속에 감금했으며, 큰 독 안에 사람을 집어넣고 주위에 불을 때기도 했다. 또 인체의 백 가지 맥을 누른다는 ‘정백맥(定百脈)’ 등 기발한 형구를 열 가지나 제작했다. 여기서 비롯된 ‘청군입옹(請君入甕)’의 고사는 ‘신당서’에 보인다.

혹리로 악명 높은 주흥을 도리어 모반죄로 밀고한 사람이 있어서 내준신이 은밀히 심문하게 됐다. 주흥을 식사에 초대한 내준신이 죄수가 자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좋으냐고 물었다. 자기가 고발된 사실을 모르는 주흥은 아주 간단하다며 큰 독에 넣고 뜨거운 숯으로 주위를 둘러싸면 된다고 비법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내준신이 그 말대로 준비한 다음, 주흥에게 고발됐으니 독 안으로 들어가라고 청했다. 놀란 주흥이 땀을 흘리며 엎드려 자백했다. 그는 결국 귀양길에서 원수의 손에 죽었다. 이는 당 전기의 문인 장작(張鷟)이 지은 야담집 ‘조야첨재(朝野僉載)’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도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 일화를 실었다.

이들은 한때 권력에 빌붙어 위세를 떨치며 공포 사회를 만들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다수가 주흥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내준신도 저잣거리에서 참수되고 가산은 몰수됐다. 그들은 애초에 무후가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공포정치로 권력이 안정되자 무후는 그들을 하나씩 물리치기 시작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역대 관찬 사서 속의 ‘혹리열전’은 사마천(司馬遷)으로부터 비롯됐다. ‘사기’의 해당 열전에는 질도(郅都)와 장탕(張湯) 등 가혹한 형리 10여 명의 행적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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