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자 50만명 품은 스페인… 내쫓는 대신 일할 기회 줬다, 왜? [숨은유럽찾기]
이민 단속 강화한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불법 체류자 50만 명에 대규모 사면조치
"코로나 이후 관광 회복세에 경제성장,
이민자 노동력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세금 내고 사회보장제도 유지에도 기여
스페인어 하는 중남미 출신이라 통합 유리
편집자주
혹시 여행으로만 유럽을 경험하셨나요. 매월 연재하는 '숨은유럽찾기'에선 평온한 관광지에선 볼 수 없는 유럽 각국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드립니다. 드러난 뉴스의 이면도 들여다 봅니다. 때론 불편한 진실이 우리에게 피와 근육이 됩니다.

11일 오전 9시 30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센트로 지구에 있는 이민청 앞. 출입구에 붙은 “예약제로만 운영된다”는 문구가 무색하게 운영 시간을 앞두고 중남미 출신 이민자로 보이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최근 스페인 정부가 “불법 이민자 50만 명에게 합법적 체류 자격을 부여하겠다”는 대규모 사면 조치를 발표한 이후 관련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지난달 20일부터 합법적 거주 신청을 받고 있는 접수처 중 하나인 이민청 주변에는 △신청 자격 요건과 △제출 서류 △예약 방법 등이 적힌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온 남성은 휴대폰 카메라로 포스터에 담긴 내용을 빠짐없이 찍었고, 오전 10시 대면 접수를 예약한 여성은 서류 뭉치를 들어 보이며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류 발급 및 예약 방법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등지에서 무비자 관광객으로 입국,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스페인에 장기간 거주하며 일하는 이들에게 대규모 사면 조치는 꿈만 같은 소식이었다. 강제 추방 대신 합법적으로 일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 이민 단속을 강화하며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는, 반이민 정서가 급속도로 퍼진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180도 다른 행보다.
이들은 최소 5개월 이상 스페인에 거주했고 범죄 경력이 없으며, 현지에 고용된 사실 등을 증명하면 1년짜리 취업 허가증을 받게 된다. 단 난민처럼 임시 보호를 받은 적이 없어야 한다. 이후 일정 요건을 갖추면 정식 비자를 획득할 길도 열린다. 신청 기한은 다음 달 30일까지로 첫 날에만 1만9,633명이 몰렸다.
”불법 체류자 EU로 수출” 반발

스페인 정부의 이례적 행보는 유럽연합(EU)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EU 이민∙망명 협약과 정면충돌하는 이 합법화 조치를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가 EU와 사전 협의 없이 밀어붙였다는 이유에서다.
이 협약은 신속한 이민∙난민 심사로 부적격자를 즉시 가려내고 추방해 불법 입국자들의 장기 체류를 막는 것을 골자로 한다. 유럽 대다수 국가는 “스페인이 불법 체류자를 EU 전역으로 수출하려고 한다”며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EU 회원국 내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는 솅겐조약에 따라 이들이 손쉽게 국경을 넘을 것이란 우려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조르당 바르델라 대표는 “사면된 불법 체류자들이 당장 프랑스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심지어 정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스페인 내부 반발도 적지 않다. 보수 성향의 국민당(PP)은 “이번 조치가 스페인 공공서비스의 과부하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고 극우 정당인 복스(Vox)는 “산체스 총리가 스페인 국민을 다른 인종으로 대체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앞서 "이민이 유럽을 망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민자 없으면 경제가 안 돌아간다”

산체스 좌파 정부의 무리수일까, 아니면 현실을 감안한 불가피한 조치일까. 2010년 스페인 정부에서 이민·이주 담당 국무장관을 지낸 안나 테론-쿠시 이민정책연구소(MPI) 선임연구원은 한국일보에 “스페인은 EU에서 몇 안 되는 좌파 정부지만 그것만으로 합법화 조치를 설명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이라며 “스페인의 인구학적∙사회경제적 현실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출산 고령화로 부족해진 노동력을 이민자들이 메우며 2020년대 이후 스페인 경제 성장을 주도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연간 관광객 1억 명이 찾는 관광대국 스페인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관광산업이 회복세를 보이면서 2022년에만 약 5%의 경제성장률을 찍었다. 최근 4년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3%대로 유로존 평균(1~1.5%)의 2배 수준이다. 스페인 관광산업을 떠받치는 음식점 종업원, 숙박업 종사자, 운전기사 같은 저임금 서비스 노동력을 이민자들이 채우지 않았다면 EU 회원국을 크게 능가하는, ‘스페인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정부 판단이다.
스페인은 가사 서비스의 72%, 접객업의 45%, 건설업의 32%, 농업의 31%를 이민자들에게 의존하는데 2024년 신규 일자리의 90%는 이민자들이 채웠다. 이민자들이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실제 이날 마드리드에서 목격한, 식당이나 호텔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상당수는 중남미 출신 이민자였다.
하비에르 디아스-히메네스 IESE 경영대학원 경제학과 교수는 전화인터뷰에서 “관광산업이 주력인 스페인 경제는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더 노동집약적이고 저숙련 노동을 요구하는데 현지인들은 꺼리는 직종이라 이민자들과의 일자리 경쟁은 거의 없다”며 “이민자 대부분은 중남미 출신으로 스페인어를 구사해 사회 통합에도 유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보장제도 유지에도 기여

음지에서 일했던 불법 체류자들이 세금을 내고 사회보장 제도에 기여하는 효과도 있다. 합법적 지위를 부여받은 이민자 1인이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규모가 연간 4,000유로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산체스 총리는 “스페인도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라며 “노동과 사회보장제도에 기여할 새로운 인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번영은 둔화되고 보건·연금·교육 등 공공서비스가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스페인에서 이민자가 국내총생산(GDP)의 25%, 사회보장 수입의 10%를 기여하는 반면 이들이 공공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1976년만 해도 3,610만 명에 머물렀던 스페인 인구가 최근 5,000만 명에 육박하게 된 것도 이민자 유입 덕분이었다. 외국인 인구는 지난해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어섰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한다.
애초에 합법적 입국 경로가 없었다

바르셀로나 국제관계센터(CIDOB) 이민 분야 선임연구원인 블랑카 가르세스-마스카레냐스는 애초에 이민자를 노동 시장에 편입하기 위한 합법적 경로가 없었기에 대규모 사면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행법은 거주 허가를 받기 위한 요건으로 노동 계약을 우선시하지만 이민자들이 스페인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에 계약하긴 힘든 구조”라며 “합법적 통로가 존재하지 않기에 관광객 자격으로 입국한 노동자들은 곧바로 불법 체류자가 됐고 이후 합법화 절차를 거치는 패턴을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스페인 정부가 불법 체류자에 대한 대규모 사면 조치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6년을 시작으로 △1991~1992년 △1996년 △2000년 △2001년 △2005년에 이어 이번이 총 7번째다. 보수 정당인 국민당 정부에서도 두 차례 합법화 조치에 나설 정도로 좌우를 막론하고 추진한 정책이었다. 현재까지 120만여 명에게 합법적 지위가 부여됐지만 1년 후 갱신 혹은 정식 비자 취득 과정에서 안정적인 고용 상태를 증명하지 못해 또다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다만 반대론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합법화 조치가 더 많은 이민자를 끌어들일 것’이라는 우려는 입증되지 않았다. 가르세스-마스카레냐스 선임연구원은 “이민을 끌어들이는 핵심 요인은 이민 정책이나 합법화 조치가 아니라 경제 그 자체였다”며 “경제성장이 없으면 이민자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표적 사례가 미국”이라며 “미국은 합법화 조치 가능성이 작지만 경제 성장으로 1,200만 명에 달하는 불법 체류자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제 스페인은 단기간 이민자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한 나라로 꼽힌다. 이민자 유입으로 인한 일자리 경쟁이나 범죄 증가는 없었지만 주택, 의료, 학교 등 공공서비스는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테론-쿠시 선임연구원은 “인구가 많아질수록 더 많은 공공서비스가 필요하다”며 “이민자를 포함해 더 많은 인구를 감당하려면 그에 걸맞게 공공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은

스페인의 불법 체류자 합법화 조치가 단일민족 의식이 강한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농어업, 건설, 물류, 제조업 분야 등에서 이민자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은 스페인과 불법 체류의 경로가 다르다. 애초에 합법화 경로가 존재하지 않는 스페인과 달리 한국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필요한 만큼 외국인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받는다. 다만 장기 정착을 위한 제도가 아닌 탓에 상당수 노동자는 체류 기간이 지나도 출국하지 않아 불법 체류자가 된다.
디아스-히메네스 교수는 “한국이 지금처럼 스페인(1.3명)보다도 낮은 출산율(0.8명)을 이어간다면 단일민족 국가를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며 “장기 정착 이민 등 이민 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인구 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 해소와 지속 가능한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해결책이 현재로선 이민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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