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시계 태엽을 감는 5월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폐쇄된 동물원에서 늙고 진이 빠진 코끼리를 마을 사람들이 돌보게 되는데, 피리를 불며 깡통 밟기를 시켰더니 코끼리는 삶의 의미를 되찾은 듯 생기를 되찾았다는 이야기. “코끼리 사육사의 피리 소리와 함께 12캔의 하이네켄 깡통은 멋진 한장의 초록빛 판이 되었다. 그 초록빛 판은 5월의 태양 아래 하늘에서 본 아프리카 평원같이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하이네켄 맥주 빈 깡통을 밟는 코끼리에 관한 단문’을 좋아한다.
연두색 풀잎 위로 초록 바람이 불어오던 화창한 어느 봄날, 바쁜 일정을 마무리하고 록 페스티벌까지 마쳤기에 달궈진 심장을 식히기 위해 오랜만에 한잔했다. 전날 페스티벌에서 50분 동안 무거운 베이스 기타를 들고 뛰어다녀서인지 온몸이 쑤셔댔다. 나는 냉장고에서 초록색 캔맥주를 꺼낸 뒤 청록색 소파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버터 녹듯이 치익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갔다.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면 마치 내가 작가라도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속으로 ‘나는 지금 맥주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니야. 창작을 하고 있는 거지. 기차에 석탄 연료를 넣듯, 황금빛 탄산을 내 뱃속으로 넣어 연소시키며 말이야’라고 허세를 떤다.
달콤한 휴일, 나는 고즈넉한 서울 고궁 근처를 산책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순라길에 가서 우거진 초록 나뭇잎 사이를 걷다 보니, 거리의 악사가 이름 모를 현악기로 신비로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마치 초록 연못 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했다. 친구들과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뒷문을 통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빈티지 시계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무엇인가 홀린 듯 시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한번 둘러보고 2분도 안 돼서 초록색 시계를 골랐다. 시계 상표도 안 보고 연식도, 작동 방식도 모르고, 정말 시계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 없이 단지 끌린다는 이유로 골랐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친구가 말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격대가 조금 있는 시계인데, 아무 정보 없이 덜컥 사느냐고, 걱정스레 나를 나무랐다. 그렇게 시계 가게 주인 앞에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한 뒤, 초록 시계를 구매했다. 시계 가게 주인의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훗날까지 재미난 잔상으로 남는다.
예전에 미국 투어를 다녀오며 통기타를 사 온 적이 있다. 그때도 어떤 목재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스펙인지도 잘 모른 채 마음에 드는 기타 두대를 고르고 직원에게 연주를 부탁하고는 눈을 감고 들어보며 좋은 울림만으로 기타를 선택해 구매했다. 기타를 좋아하던 친구가 그런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악기의 상표를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사용하면서 가치와 서사가 생기는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는 끌림이다. 스펙을 보고 의미를 찾는 게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모험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좋은 소리의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악기도 각자만의 고유의 색깔이 있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철없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조건을 따져가며 만나는 것보다 그저 끌림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은 어떨까?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왔다. 그렇게 박치기하면서 핑 도는 세상을 노래해 왔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서 시계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라고, 초록 시계의 이름을 초록색 캔으로 된 라거 맥주의 이름을 따서 ‘하이네켄’이라고 지어줬다. 이 시계는 태엽을 감아 줘야 한다. 나는 술을 마시는 날에 반지를 끼고 나간다. 술을 많이 마셨을 때 손가락이 퉁퉁 부어서 반지가 잘 안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손오공 머리띠 조이듯, ‘아, 많이 마셨다는 신호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다. 수동 태엽을 주기적으로 감지 않고 시계가 멈춰버린다면, 손가락이 붓듯 일상이 조금은 궤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의미를 부여해 주면 이 친구도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계를 계속 보다 보니,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시계태엽이 풀리듯 우리도 언젠간 죽게 되겠지? 필멸자로서의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괜한 마음에 챗지피티에 물어보았다. “나도 언젠간 죽겠지?” 그랬더니 챗지피티가 대답했다. “캡틴락, 요즘 피곤한 것 같은데, 너무 심각한 생각하지 말고, 얼른 자는 게 좋겠다.” 이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란 맥주 거품 같은 것 아닐까? 분명 존재하는데, 꿈처럼 사라져 버린다. 영원히 사는 것이라면 시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우리네 인생이 감을 수 없는 태엽이란 것을 기억한다면 시간의 가치와 농도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나는 이 글이 하루키의 단문처럼 5월의 초록색 녹음을 머금고 반짝이는 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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