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하면 이긴다” 나라를 지킨 춘천-홍천지구 전투 [호준석의 역사전쟁]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6. 5. 17. 09: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기습 남침에 서울이 사흘 만에 함락되고 국군 9만8000명 병력 중 4만4000명이 전사, 실종 또는 포로로 잡힌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철저한 사전 대비로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낸 전투가 있습니다. 이 전투가 있었기에 한강 방어선이 지켜졌고,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남침 당시 중부 전선을 지키던 부대는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6사단이었습니다. 예하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는 춘천, 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는 홍천 북동쪽, 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는 사단 예비대로 원주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38선에서 춘천까지는 13㎞에 불과했습니다. 춘천을 지키던 6사단 7연대는 남침 징후가 짙어질 때 육군본부의 지시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춘천고 학도호국단 학생들과 춘천 시민들의 지원까지 받아 철근 콘크리트로 대전차 진지를 설치하고, 교통호를 연결해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설치하고 대인 지뢰를 묻었습니다. 6사단은 연대마다 공병 중대 1개씩을 배속시켜 진지 구축과 장애물 설치를 지원했습니다. 특히 포병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16포병대대를 춘천으로 전진 배치해 포 진지를 구축하고 군의관까지 포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습니다.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육군 준장 예편)은 적의 예상 접근로를 일일이 답사하면서 치밀한 화력 계획을 준비했고 탄약도 충분히 비축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 전쟁은 결코 소리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417회의 남침 징후 첩보가 육본에 보고됐지만 묵살됐습니다. 그러나 6사단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30명의 수색대를 적 지역에 투입해 남침 징후를 파악했습니다. 그 결과 38선 이북 화천과 양구에 인민군 보병 부대와 차량 수십 대가 집결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소련군 출신 이청송이 이끄는 인민군 정예 부대 2사단은 6월 17일 야간 행군으로 화천까지 이동, 포진해 있었습니다. 김종오 6사단장은 이 사실을 육본에 보고했지만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묵살했습니다. 6월 22일에는 6사단 7연대로 인민군 전차병이 귀순했습니다. 전차 1개 대대가 화천에 집결하고 있다는 진술에 임부택 6사단 7연대장이 직접 관측한 결과 없던 포 진지가 보이고, 포신은 남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임부택 연대장은 곧 남침이 시작된다고 판단하고 육본에 보고했지만 묵살됐습니다. 6월 24일 육본은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고 장병들의 외출·외박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6사단은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지 않았고 외출·외박도 통제했습니다.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당시 6사단 7연대 헌병대장 조혁환(예비역 준장) 증언)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월 25일 새벽 결국 남침이 시작됐습니다. 중부전선에는 새벽 5시부터 30분 동안 엄청난 포격이 쏟아졌습니다. 국군은 한동안 넋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포격이 끝나자 적의 진격이 시작됐습니다. 안개마저 짙게 깔려 전초기지의 국군은 적군이 진지 바로 앞까지 육박해서야 알 정도였습니다. 중부 전선을 맡은 인민군 부대는 2군단이었습니다. 2군단은 서울로 쳐들어간 ‘주공(主攻)부대’ 1군단을 돕는 ‘조공(助攻)부대’)였지만, 전술적 중요성은 컸습니다. 2군단은 춘천, 홍천을 신속히 점령한 뒤 서쪽으로 수원 일대까지 치고 들어가 국군 주력을 포위, 궤멸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전쟁은 사실상 끝이었습니다.

빨치산 출신인 2군단장 김광협은 늦어도 26일 낮까지는 반드시 춘천을 점령해야 한다고 인민군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남침에 철저히 대비해 온 국군 6사단은 적의 공격에 용감하게 맞섰습니다. 이미 38선상에서 여러 번 인민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 본 장병들은 인민군이 별게 아니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공산주의의 실상을 체험한 뒤 월남한 청년들이 많았던 7연대 2대대는 특히 사기가 높았습니다. 인민군 2군단은 정예 부대인 2사단 6연대가 두 차례 공격에 실패하자 25일 오후 6시 17연대까지 투입돼 소양강을 도하하려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소양강만 건너면 바로 춘천 시내였습니다. 국군을 가볍게 본 인민군은 은폐물조차 없는 가래머리(춘천시 사농동의 마을)의 보리밭을 따라 밀집 대형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이때 6사단 포병의 화력이 빛을 발했습니다. 6사단 포병은 이미 고지에 포 진지를 구축하고 훈련을 거듭해 온 상태였습니다. 인민군이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 대는 데 비해, 6사단 포병은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서 포격을 해 효과적이었고 낭비가 없었습니다.(당시 7연대 중대장 이대용(예비역 준장) 증언)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보리밭은 누런데 적은 꺼멓게 파리떼와 같아 구별이 용이하여 목측(目測)으로 사격하였다. 조준할 시간 여유도 없었다. 포탄은 VT탄이 없어 순발신관(가벼운 충격에도 폭발하는 신관)을 썼다”(당시 6사단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 증언) “쓰러진 인민군의 빨간 계급장과 흘린 피로 소양강 일대 벌판이 붉게 물들었다.”(당시 6사단 7연대 헌병대장 조혁환(예비역 준장) 증언, 이상 <대한민국 근현대사시리즈>(박윤식 저))

보병과 포병의 합동 공격으로 6사단 7연대는 적에 궤멸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7연대 1대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양강 서쪽으로 이어지는 북한강까지 적을 추격했습니다. 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지형상 방어보다 공격이 더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공세를 주도했습니다. 26일 아침 8시 7연대 1대대는 옥산포에서 인민군 1개 대대를 공격해 전멸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거뒀습니다. 이것이 옥산포 대첩입니다. 옥산포 대첩의 주역 김용배 소령은 문경 출신으로 육사 5기였습니다. 그는 ‘최고의 군인, 천재적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 았습니다(당시 1대대 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 증언). 춘천 전투와 음성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지연작전을 성공시켰고 1951년 1월 6일까지 7연대 1대대장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최전방에서 싸웠습니다. 적탄에 부상을 입었을 때도 후송을 거부하고 붕대를 감은 채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1951년 7월 7사단 연대장으로 양구 군량리 전투를 치르다 전사했고, 준장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음날인 27일 새벽 5시. 인민군은 다시 포병의 강력한 지원 사격 아래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습니다. 7연대 1대대는 화력을 총동원해 도하를 저지했습니다. 격전 끝에 인민군은 도하를 포기한 채 자주포 5대까지 버리고 북쪽으로 후퇴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북한군 제2사단은 국군의 기습적이고 강력한 포격에 큰 손실을 입고 사단장은 전투 지휘도 포기한 채 포병대대장과 함께 자주포용 차량을 타고 도주했다”(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인민군 남침 계획인 ‘선제타격계획’에는 2군단이 6월 25일 점심 때 춘천을 점령한 뒤 홍천과 원주를 지나 서쪽으로 포위기동(국군의 측면과 후면을 둘러싸 포위하며 진격하는 것)해 28일에는 서울 남쪽 이천-용인-수원 선으로 진출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민군은 춘천에서 사흘 이상 패전을 거듭하며 멈춰 섰습니다. 이천-용인-수원이 인민군 2군단에 장악됐다면 국군은 퇴로가 막혀 궤멸됐을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한편 홍천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 2연대는 함병선 대령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인제에서 남하한 인민군 12사단은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어론리 일대에서 2연대를 공격해 왔습니다. 함 대령은 “이제 조국의 운명은 저 전차(자주포)와 싸워 이기느냐 지느냐의 한판에 달렸다. 저 전차를 때려 부술 용사는 없느냐”고 외쳤습니다. 5중대 강승호 소위 등 20여명이 앞 다퉈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대전차 특공대를 편성해 적의 자주포에 수류탄을 집어넣은 뒤 2.36인치 로켓포탄을 사격해 자주포 2대를 파괴했습니다. 사기가 오른 2대대가 화력을 집중해 적을 공격하자 남은 자주포 8대도 북쪽으로 퇴각했습니다. 6월 28일 아침 9시. 자주포 10대와 수십 대의 트럭에 병력을 가득 태운 인민군 12사단이 다시 2연대를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자 조달진 일병 등 대전차 특공대원들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자주포에 뛰어들어 10대를 파괴하는 전쟁사에 빛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춘천과 홍천에서 치열한 방어전이 벌어지던 27일, 두절됐던 육본과의 통신이 복구되면서 김종오 6사단장은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된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했으니, 6사단장은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종오 6사단장은 7연대를 춘천에서 철수시켜 지연전을 실시했습니다. 홍천의 2연대도 인민군이 공격할 때마다 반격하다 후퇴하는 방법으로 끈질기게 남하를 저지했습니다. 국군은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기동전이 산악지형에서는 효력이 반감되는 점을 활용해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기습전을 반복했습니다. 인민군은 30일 오후 6시쯤에야 홍천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6사단이 춘천과 홍천을 지켜내는 동안 서부전선에서 패퇴했던 국군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해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흩어졌던 장병들이 다시 집결했고 인민군의 한강 도하를 7월 3일까지 막아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결의했습니다. 7월 1일 미군 스미스 특수부대가 오산에 처음 도착했고 이어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24보병사단이 부산을 통해 상륙해 경부축선에 전개됐습니다. 춘천-홍천지구 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미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6.25전쟁의 승패는 갈렸을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뼈아픈 실패를 맛본 김일성은 개전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을 대거 해임했습니다. 2군단장 소장 김광협은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됐습니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오빠로 알려진 김광협은 나중에 부수상까지 지냈지만 1970년 주체사상을 비판하다 숙청됐습니다. 김광협의 후임으로 2군단장이 된 중국 팔로군 출신 김무정(일명 무정)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한 뒤 숙청돼 죽었습니다. 춘천 전투에서 전투지휘까지 포기하고 도주했던 2사단장 이청송도 해임됐습니다. 이청송은 나중에 병력 모집 임무를 띠고 목포까지 내려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겨 빨치산이 됩니다. 그러나 정규군 출신이라며 전투에 나서지 않고 버티다 빨치산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에게 사살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춘천-홍천지구의 승리를 이끈 김종오 6사단장은 청주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대에 다니다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해방 후 국군에 투신한 그는 1950년 춘천-홍천지구 전투에 이어 1952년에는 9사단장으로 전설적인 백마고지전투 승리를 지휘했고 1962년 국군 역사상 다섯 번째 대장이 됐습니다. 1965년 전역 후 1966년 46세의 젊은 나이에 폐종양으로 별세하면서 ‘조국통일을 꼭 이뤄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사단의 주축이었던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나주 출신으로 평소 병사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최일선에 나서 지휘했습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전장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졌습니다.(이대용 당시 7연대 중대장 증언) 임부택은 이후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도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격파해 7연대 전체가 1계급 특진되는 전설적 전과를 올렸고, 1962년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6.25전쟁 개전 당시 화천-춘천과 인제-홍천 축선의 남북 병력 비율은 4.1대 1로 국군의 절대 열세였습니다. 국군에는 전차도, 자주포도, 전차에 맞설 대전차화기도 없었습니다. 곡사포 사정거리는 인민군의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인민군 2군단은 기동력이 우수한 T-34 전차, 막강한 화력의 SU-176 자주포는 물론, 모터사이클 560대로 편성된 603모터사이클 연대까지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춘천, 홍천을 뚫은 뒤 이천, 수원 방면으로 신속히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국군 6사단은 장비와 병력이 열세라 해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대비하고 철저하게 훈련한 부대는 적을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습니다. 이들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이 조국을 지켰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