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가해자의 사과 문자, 그래도 ‘혐의 없음’ [세상에 이런 법이]
가해자는 사건 직후 피해자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다. 가해자는 해당 사건의 발생 사실을 인정했고 피해자는 당시 벌어진 사건을 인정하는 가해자의 녹취도 갖고 있었다. 나는 피해자에게 강제추행 혐의로 가해자를 형사고소하라고 권유했다. 예상되는 장애물도 없었다. 고소장 제출 후 상황은 급변했다.
내가 이 사건을 진행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까닭은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과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건 직후 가해자의 사과 문자였다. 가해자가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사과할 이유가 없는 것은 분명한 이치다. 하지만 고소는 실패했다. 수사기관은 가해자에 대한 고소 범죄사실을 ‘증거불충분’으로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는 “대법원이 입장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2024년 이전 대법원은 “피해자 등의 진술은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또한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아니 된다(대법원 2018.10.25. 선고 2018도7709 판결 참조)”라고 판시했다. 범죄 주요 사실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된 경우 법원은 그 자체를 중요한 증거로 보아 가해자에 대한 유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2024년 대법원(2023도13081)은 “성인지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이 형사법의 대원칙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라고 판시했다. 즉 피해자가 주요 범죄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해도, 가해자가 제출한 반박 증거나 객관적 정황에 비추어 ‘합리적 의심’이 든다면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례는 법원의 판단뿐만 아니라 수사기관의 혐의 인정과 기소 여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수사와 재판 현장에서는 ‘합리적 의심’도 없이,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만으로는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편의적인 판단이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성범죄는 그 특성상 목격자나 CCTV가 없는 곳에서 은밀히 발생한다. 직접 증거가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종류의 범죄일수록 의심에 의심을 더해 합리적 의심을 거쳐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대법원 판례 이후 수사기관의 편의적 판단
앞서 언급한 사건의 경우 가해자는 수사기관 조사 당시 “피해자가 먼저 나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했고 이후 동의하에 발생한 스킨십이다”라고 주장했다. 피해자는 범죄 발생일로부터 2년 동안 고소를 진행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은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증거가 불충분하여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 의심일까? 과연 이러한 정황증거가 범죄 직후 피해자에게 보낸 사과 문자의 증명력을 부인할 정도로 중요한 증거인지 합리적으로 의심해보자는 것이다.
이 사건 가해자는 직장 상사였다. 피해자는 범죄 직후 형사고소를 하고 싶었지만 인사상 불이익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는 직장에서 상습적으로 성추행 발언을 했고, 피해자는 2년여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산부인과 질병을 얻었다. 또 정신과 약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극도의 불안 증세를 겪었다. 피해자는 결국 참다 못해 형사고소를 했다.
수사기관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피해자에게 폴리그래프 검사(거짓말탐지기 검사)를 받을 것을 강요했다.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사람은 폴리그래프 검사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인데도 말이다. 수사관은 피해자에게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거부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 아니겠느냐”라는 말까지 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형사법의 대원칙이다. 이를 방패 삼아 다시 성범죄 사건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다. 그것이 대법원이 언급한 ‘합리적 의심’은 아닐 터이다. 수사기관에 인권 보호를 위한 세심한 배려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최소한 법에 정해진 절차만이라도 지켜달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억울한 가해자와 억울한 피해자 발생을 모두를 막을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권혜진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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