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화장실과 뭐가 다른가"… 두려움은 커지고 처벌은 여전히 약했다
11일간 온·오프라인 포스트잇 총 511건 수집
범죄·두려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작년 생성형 AI 등 허위영상물 신고 1,491건
일상 속 차별·성희롱 등 인식 "많이 개선됐다"

어느새 10년이다.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근처 상가 공용 화장실에 숨어 있던 30대 남성이 일면식 없는 한 여성에게 마성을 드러냈다. 피해 여성에 앞서 남성 6명도 그곳을 지났지만 '남성이라는 이유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가해 남성은 '여자들이 무시해서'란 말로 변명을 늘어놓았고, 시민들은 포스트잇으로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채웠다. "너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다니" 등의 분노 가득한 문구가 피해 여성을 추모했다.

5월이 됐고, 한국일보는 강남역 10번 출구 앞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분주했고, 출구 앞 사람들의 표정은 10년 전 그것과 큰 차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지난 10년, 그들이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사건 이후의 변화. "과연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물었고, 대답을 포스트잇으로 받았다. 온라인 플랫폼을 제공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와 함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홍보도 더해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11일간 온·오프라인으로 511개에 달하는 답변을 받았다. 이 중 현장 및 인터뷰로 총 29명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기억하시나요?
10년의 시간 탓일까. 사건 당시 어린 나이였던 참여자들은 대체로 강남역의 그날을 알지 못했다. 온라인 설문 참여자 '보리'는 "(그때는) 고등학생이라 사건을 잘 몰라서 어른들이 피해 입은 줄 알았는데 평범한 청년이었네요"라고 말했고, 또 다른 참여자 '행운의귀똘이'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고 사건이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이번 기회로 알게 됐다"고 적었다.
반면 경기 파주시에 거주하는 고교생 최은규(16)양은 사건 당시 고작 여섯 살이었지만,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10년 전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요"라는 답변, 이어 쓴웃음을 지으며 이유를 내놓았다. "맨날 여자들이 죽어 나가잖아요."
여성이 편안한 사회는 한참 멀었다

포스트잇 답변 3건 중 1건(162건·31.7%)에는 최양처럼 '10년간 그대로였다, 더 나빠졌다'는 답변이 담겼다. '여성 대상 범죄는 더 심해진 것 같다'거나 '10년 전 화장실과 지금의 화장실이 무엇이 다르냐' 등의 의견이 더해졌다. 특히 지난 5일 광주에서 발생한 10대 여고생 살해 사건이나 지난달 26일 벌어진 공중화장실 휴지 접착제 사건은 이 같은 답변에 힘을 실었다. 답변자들은 여성이 일상을 보내기 편안한 사회가 되었는지 오히려 되묻고 있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으로 일상 속 불안이 더 커졌다는 답변도 다수(23건·4.5%) 있었다. '물리적 가해를 넘어 온라인, 딥페이크를 통한 심리적 가해까지' '길거리는 나아졌는데 온라인이 말썽이다' 등의 답이 잇따랐다. 20대 딸을 둔 이정훈(55)씨는 "마음 놓고 멋 내고 뽐낼 나이인데 혹여나 프로필 사진이 딥페이크 합성될까 걱정하는 게 안타깝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들 걱정은 실제 경찰청 통계로 확인된다. 2016년 3,777건이었던 사이버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는 2020년 4,831건으로 대폭 증가했다. 지난해 4,273건으로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다. 생성형 AI 등으로 만든 허위영상물 발생 통계 수집은 2020년 하반기부터 시작했는데, 지난해 기준 허위영상물 발생 건수는 1,491건(34.9%)에 달했다.

사법체계와 제도를 문제 삼는 의견은 42건(8.2%) 정도였다. '판결문을 보면 성범죄 감형 사유가 어이없다'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조치가 미흡하다' 같이 여성 대상 범죄의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체로 담겼다. 직장인 김민정(31)씨는 "성범죄 판결이 안일하게 이뤄지면 '남자는 여자에게 이래도 된다'는 학습효과를 준다"며 "피해자를 우선하는 수사와 재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성혐오 범죄 경찰 통계가 없다' '여성 정책이 형식적인 내용에 그친다'는 등의 문제 제기도 다양하게 언급됐다.
물론 시민들은 우려에 희망을 더했다. 갈등이 해소된 사회를 꿈꾸는 소망(40건, 7.8%)이었다. '혐오가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 발씩 물러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보자'는 의견들이었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사건을 계기로 여성 의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긍정적인 변화가 이뤄졌다는 포스트잇(78건, 15.3%)에 담긴 의견으로 취업 준비생 이지원(34)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비극에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10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노무사 준비로 한창 바빴던 이씨는 강남역 사건 직후, 여성끼리 자신의 여성혐오 피해 경험을 연단에서 공유하는 '자유발언대'의 진행자로 나섰다. 그때 찜찜하지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던 경험들, 이를테면 초등학생 때 이웃 할아버지가 "예쁘다"며 입을 맞춰 불쾌하다고만 생각하고 넘긴 일 따위를 또래 여성들이 비슷하게 겪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여성들이 더 이상 죽지 않으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여성단체 활동을 시작했고, 전문성을 더 갖추고자 로스쿨 졸업 후 수험 공부 중이다. 이씨는 "확실한 변화는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말이 사라진 것"이라며 "'여성은 연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기본 전제가 깨졌다"고 회상했다. 이씨 외에도 '요즘에는 이런 게 성희롱이라며? 라고 주저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여성 피해자를 탓하는 인식이 사라졌다' '여성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아직 부족하다' '제도는 그대로' 등의 입체적 평가도 많았다. 제약업계에서 일하는 김수정(30)씨는 "범죄자 추적 시스템은 늘어난 것 같은데, 사전에 예방할 정책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여성안심귀갓길, 안심벨 등 대책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고 보는 의견도 보였다.

166건(32.5%)의 포스트잇에는 피해자 애도, 여성 인권 증진과 연대, 변화의 바람이 담겼다. 참여자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간다' '우리의 목소리가 모이면 그다음 10년 뒤에는 더 나은 세상이 되어 있겠죠' 등의 희망을 적었다. '여성혐오 범죄와 안전을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5년 차 직장인 정현지(34)씨는 "퇴근길 동행 같은 방식의 접근은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보게 해서 능사가 아닌 것 같다"며 "여성들의 걱정과 분노를 동료시민으로서 이해하고 공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 폭력·범죄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게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집단 위험이란 인식 전환을 심어줬다"고 평가하며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여성 폭력을 통합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스트잇의 전체 내용이 궁금하다면?
아래의 링크를 누르거나 QR코드를 스캔해 주세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10년 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시민들의 의견이 담긴 500여 개의 포스트잇을 읽고 자유롭게 생각을 남겨 주세요.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남병진 기자 south@hankookilbo.com
나민서 기자 ia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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