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챠 망해도 도파민 뿜뿜”… 2030 사로잡은 ‘랜덤 소비’
가챠숍 이어 랜덤 물품 뽑기도 확산
“기대감·불확실성이 반복 구매 자극”

8일 오후 7시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한 가챠숍. 형형색색의 캡슐 뽑기 기계 앞에는 원하는 캐릭터를 고르려는 소비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챠 기계 손잡이를 돌린 뒤 캡슐을 열어보는 순간 짧은 탄성과 아쉬움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일본 의성어 '찰칵'에서 유래한 '가챠'는 캡슐 안에 든 장난감 같은 물품을 뽑는 확률형 뽑기 기계를 뜻한다.
친구와 함께 가챠숍을 찾은 대학생 A(22)씨는 “원하는 상품이 나오지 않아도 뜯어보는 과정 자체에 재미가 있다”며 “랜덤 소비는 물건을 사기보다 그 경험 자체에 돈을 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2030세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랜덤 소비’가 주요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캡슐 뽑기 형태의 가챠를 비롯해 키링과 포토카드 랜덤 뽑기, 랜덤 박스 개봉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소비 방식이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서울 홍대와 성수 일대에는 대형 가챠샵과 랜덤 굿즈 매장이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A씨는 “홍대나 성수 쪽에 가챠샵이 정말 많아졌고, 실제로 매장에 가보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경우가 많다”며 “빌딩 전체가 가챠샵인 공간을 보고 인기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식음료업계 역시 랜덤 마케팅에 뛰어들고 있다. 이디야커피는 지난달 21일 포켓몬 협업 2차 굿즈 행사에서 랜덤 피규어 마그넷 8종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실패 자체도 재미”… 놀이가 된 랜덤 소비
랜덤 소비의 가장 큰 특징은 결과보다 과정을 즐긴다는 점에 있다. 소비자들은 원하는 상품을 얻지 못해도 다시 구매를 반복하며, 이 과정 자체를 하나의 놀이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김민지(22)씨는 친구들과 랜덤 가챠를 자주 한다. 그는 “망한 상품이 나오면 서로 비웃는 재미도 있고, 망해도 도파민이 돈다는 점에서 계속 랜덤 소비를 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 접하는 제품일수록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되는데 랜덤 소비는 그런 선택의 어려움을 줄여주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된 언박싱(물품 개봉) 문화 역시 랜덤 소비 열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등에서는 캡슐 뽑기 상품을 개봉하는 ‘가챠깡’과 랜덤 박스·랜덤 굿즈를 뜯어보는 ‘랜덤깡’ 콘텐츠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원하는 캐릭터가 나올 때까지 수십 개의 상품을 연속 구매하거나, 희귀 상품이 등장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랜덤 포토카드와 피규어, 키링 개봉 영상은 조회 수 수십만 회를 기록하기도 한다. 소비자들은 결과를 기다리는 긴장감과 예상치 못한 결과에서 오는 재미를 하나의 콘텐츠처럼 소비하고 있다. A씨는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면 친구들과 비교하거나 SNS에 올리게 된다”며 “실패 자체도 하나의 재미 요소처럼 소비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유행이 아닌 ‘경험 소비’ 확대 흐름으로 해석한다. 소비자들이 물건의 실용성뿐 아니라 과정에서 얻는 재미와 감정적 만족까지 함께 소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계획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던 방식에서 경험 자체를 즐기는 형태의 소비로 변화하고 있다”며 “최근 MZ세대는 제품 자체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기대감과 개봉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자체가 소비자의 도파민을 자극한다”며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두근거림과 기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작은 사치의 시대”… 고물가 속 커지는 랜덤 소비

전문가들은 랜덤 소비 확산 배경으로 고물가 시대의 소비 변화 트렌드도 꼽는다. 삼정KPMG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소비 패러다임의 대전환기, 유통·소비재산업의 리퀴드 소비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소비 시장에서는 작은 사치로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 ‘스몰 럭셔리(Small Luxury·작은 사치)’ 소비가 확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홍주 교수는 랜덤 소비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큰 금액의 소비는 부담스럽지만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기대감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랜덤 소비가 하나의 작은 사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예측할 수 없는 재미 자체가 소비 만족으로 이어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적은 비용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김씨는 “랜덤 소비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 상품을 경험할 수 있어 친구들과 부담 없이 즐기기 좋다”고 말했다.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아진 소비 환경 역시 랜덤 소비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교수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들이 많아졌다”며 “랜덤 소비는 누군가 대신 선택해준다는 점에서 선택 피로를 덜어주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가성비인 줄 알았는데”… 반복되는 실망과 과소비
랜덤 소비가 ‘소액으로 즐기는 재미’로 확산되면서 반복 구매를 유도하는 구조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원하는 상품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구매를 반복하거나, 기대와 다른 상품이 나와 실망하는 경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랜덤 소비를 하며 ‘가성비’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자주 경험한다고 말했다. 과거 랜덤 슬라임(끈끈하며 말랑한 촉감의 장난감)과 랜덤 스티커를 구매했던 경험이 있다는 김씨는 “막상 열어보면 비인기 제품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며 “가격 대비 상품 수는 많았지만 만족도는 낮아서 차라리 원하는 것을 직접 살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원하는 상품이 나오지 않아도 반복 구매를 하게 되는 구조 역시 랜덤 소비의 특징으로 꼽힌다. A씨는 “인형뽑기처럼 한 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며 “원하는 게 나오지 않아도 ‘다음엔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 때문에 다시 구매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팬덤 산업과 결합된 랜덤 소비는 과소비 논란을 더욱 키우고 있다. 대학생 B(24)씨는 “엔터업계에서는 랜덤 포토카드나 앨범 구성으로 팬덤 구매를 촉진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며 “특정 포토카드가 몇 년이 지나도 10만~20만 원대에 거래되는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이홍주 교수는 “랜덤 소비는 구매 전 기대감이 매우 크지만 실제 상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소비자행동 관점에서 보면 이는 ‘기대 불일치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랜덤 소비는 기대감과 흥분을 유발하고 반복 구매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도박과 유사한 메커니즘이 일부 존재한다”며 “소비자들이 제품 자체보다 구매 과정의 재미에 몰입하게 되면 과소비로 이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덧붙였다.
소비자들은 랜덤 소비가 단순한 쇼핑을 넘어 놀이처럼 소비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반복 구매를 유도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B씨는 “사회초년생의 기초자금이 이렇게 낭비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랜덤 소비가 단순 유행에 그치기보다는 경험 중심 소비문화와 결합해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소비자 스스로 절제 기준을 세우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소민교 인턴 기자 sohminkyo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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