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성공 신화’의 두 얼굴

김학재 2026. 5. 1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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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생성 이미지


■ 자본금 3천만 원으로 2조짜리 회사를 키운다?

지난달 초, 미국 뉴욕타임스에 꽤 솔깃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헬스테크 스타트업 '메드비(Medvi)'를 창업한 로스앤젤레스의 한 청년, 매튜 갤러거(Matthew Gallagher)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그는 평생 한 줄의 코드도 짜본 적 없는, 개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단돈 2만 달러(약 3,000만 원)와 12가지 AI 도구만으로 회사를 차렸습니다.

직원은 본인과 나중에 합류한 동생 딱 두 명입니다. 그런데 첫 해 매출이 4억 달러(약 6,000억 원). 2026년엔 18억 달러(약 2조 7,000억 원)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놀라운 성공 스토리였습니다. 세계적 권위와 많은 구독자 수를 자랑하는 신문이 두 눈을 반짝이며 소개한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국내에서도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지인들 단톡방에 링크가 돌았고, "이게 AI 시대의 진짜 기회다"라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습니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들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 사람은 혼자 AI로 조 단위 회사를 만들었는데, 나는 왜 아직..."

뉴욕타임스의 4월 2일 자 보도


■ 고객 응대, 광고, 마케팅도 다 AI에 맡겨

갤러거의 회사 이름은 메드비(Medvi). 비만 치료제로 주목받는 GLP-1 계열 의약품을 원래 약값(월 130만 원대)의 4분의 1 가격(월 40만 원대)에 팔아치우는 원격 헬스케어 플랫폼입니다. 처방 의사도, 약국도, 물류도 모두 외주를 주었고, 그가 직접 한 건 마케팅과 플랫폼 운영이었는데, 거기서 AI가 일당백의 엄청난 활약을 했습니다.

챗GPT와 클로드로 코드와 홈페이지 문구를 썼고, 미드저니와 런어웨이 AI 도구로 광고 이미지와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일레븐 랩스라는 음성 전문 AI로 고객 상담 음성을 처리했죠. 단순하게 말하면, AI로 회사 뼈대를 통째로 세운 겁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이 "AI 없이는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예언했던 '1인 유니콘 기업'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기사가 나온 다음 날부터 반박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18억 달러짜리 기업'이라는 표현부터 다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기업가치는 투자자가 평가하거나, 인수 제안이 있거나, 주식시장이 매기는 겁니다. 메드비(Medvi)는 세 가지 중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말한 '18억 달러'는 기업가치가 아니라 한 달 매출을 12배 곱해 추정한 숫자였던 겁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뉴욕타임스 기사가 나오기 꼭 6주 전인 2026년 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미 메드비(Medvi)에 경고장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약품 오표기 혐의였습니다. 기사가 실리기 10여 일 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집단 소송이 제기됐습니다. 거짓 도메인을 이용한 스팸 메일로 소비자를 유인했다는 혐의였죠. 피해자만 10만 명 이상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실들을 기사에 담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건 광고 방식이었습니다. 페이스북에는 메드비(Medvi) 광고를 달고 있는 의사 계정이 800개 넘게 존재했는데, 조사해 보니 상당수가 AI로 만든 가짜 얼굴과 가짜 이름을 달고 있었습니다. AI로 만든 환자의 '비포·애프터' 사진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갤러거 본인도 초기 사이트에 AI 생성 이미지가 있었다고 인정했고, "그건 이미 수정했다"고 해명했습니다.

지금쯤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 신문이 그런 걸 어떻게 놓쳤지?'

그런데 저는 다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뉴욕타임스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왜 그 이야기를 그토록 빠르게 믿고 싶어 했을까. 링크를 받고 기사를 열었을 때, 어쩌면 가슴이 두근거린 분도 계실 겁니다. 'AI만 있으면 나도?' 하는 생각이 스쳤다면, 그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가능성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AI가 코딩하고, AI가 디자인을 하고, AI가 고객 상담을 합니다. 지난번 기사에서도 다룬 것처럼, 청년들이 경력을 쌓아 올릴 '사다리의 첫 칸'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나옵니다. 그 불안 속에서 "AI로 혼자 조 단위 회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마치 구명줄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저 사람은 뚫었다'는 희망의 서사. 우리가 원한 건 그 성공 스토리였던건 아닐까요?

뉴욕타임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샘 올트먼이 "AI가 1인 유니콘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고, 마침 그것처럼 보이는 사례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너무 완벽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게 아닐까요. 이야기가 너무 좋을 때 팩트가 잠드는 것, 비단 뉴욕타임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 AI 자체는 선악이 없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두고 싶습니다. 메드비(Medvi)가 논란이 됐다고 해서, AI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틀린 건 아닙니다. 실제로 창업자인 갤러거는 AI를 쓰지 않았다면 절대 혼자 할 수 없었을 일들을 해냈습니다. 코드, 카피, 광고 영상, 고객 응대 — 과거엔 팀 하나가 필요했던 일들을 AI가 압축해 줬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메드비(Medvi)가 정말로 AI로 가속한 건 다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가짜 의사 계정 800개를 만드는 것. 딥페이크 환자 사진을 대량 생산하는 것. 스팸 메일을 수십만 통 뿌리는 것. 이것들도 AI 없이는 한 사람이 혼자 하기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어떤 기술이든 그것이 가속하는 건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비즈니스 업계에서 통용되던 오래된 편법이나 탈법이 AI를 만나면 이전과는 상상할수도 없는 규모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메드비(Medvi) 사태가 보여준 것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AI로 혼자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냥 환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란이 들끓는 와중에도, 갤러거 본인이 한 말은 곱씹어볼 만합니다. "AI 기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AI로 해냈습니다(It's not an AI company, but I did it with AI)." 방법이 문제가 됐을지언정, AI를 도구로 삼아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살아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세계 곳곳에서는 소규모 창업회사들이 AI를 활용해 빠르게 제품을 만들고 시장을 개척한 사례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언론의 조명을 받지도 않았고, 엄청난 액수의 매출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AI가 사다리 첫 칸을 걷어찼다면, 이제 그 사다리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업 공채가 아니라 스스로 설계하는 사다리로.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AI의 가능성이고 어디서부터가 규칙을 무시한 편법인지. 그 선을 제대로 보는 것이야말로 AI 시대를 현명하게 항해하는 첫 번째 나침반이 아닐까요?

메드비 사태가 일단락되든 그렇지 않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샘 올트먼이 예언한 'AI 1인 유니콘'은 결국 나타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의 작은 방에서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AI가 진입장벽을 허물고 있다는 사실, 그 가능성만큼은 메드비의 논란이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메드비가 남긴 불편한 질문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AI는 혁신을 가속하는 동시에, 속임수도 가속합니다. 가짜 의사 800명을 만드는 데도, 딥페이크 환자 사진을 뿌리는 데도, 같은 AI가 쓰였습니다. 기술에는 원래 선악이 없지만, 그것을 쥔 손의 의도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AI를 향한 흥분도, 그렇다고 AI를 향한 냉소도 아닐 겁니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습관. 숫자가 화려할수록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태도. 어쩌면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장 오래된 종류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이토록 흐릿해진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좋은 AI 도구가 아니라 더 좋은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AI가 차려준 밥상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맛있게 먹기 전에 한 번쯤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밥상, 어떻게 차려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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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재 기자 (window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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