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등단, 27세 교수, 48세 별세… “내가 정치 교수라고?” 시인 조지훈

이한수 기자 2026. 5. 1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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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68년 5월 17일 48세
시인 조지훈

1950년대 시인이자 고려대 국문학 교수 조지훈(1920~1968)은 30대 젊은 나이였지만 이미 한국 시단의 중견으로 여겨졌다. 19세 때인 1939년 잡지 ‘문장’에 시 ‘고풍의상’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해방 후인 1946년 박목월·박두진과 시집 ‘청록집’을 출간했다. 1950년 서정주·박목월과 함께 공저 ‘시 창작법’을 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책 광고는 ‘우리 시단의 지보(至寶)요 거성적(巨星的) 존재인 서정주·조지훈·박목월 3인 공저’라고 카피를 뽑았다.

1950년 2월 7일 1면 광고.

1953년 제정한 ‘자유 문학상’ ‘번역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때 나이 33세였다. 동료 위원은 김동명·김말봉·모윤숙·박종화·유치진 등 대부분 10~20년 선배 문인이었다. 1953년 문교부 한글분과 위원, 1957년 발족한 한국시인협회 사무간사, 기관지인 월간 ‘현대시’ 편집위원을 지냈다. 1957년 12월 시인협회를 대표해 ‘1년 보고’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세계시인협회 가입”(1957년 12월 26일 자 4면)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 1960년 2월 시인협회 부회장에 선임됐다.

1957년 12월 26일자 4면.

1960년 잡지 ‘새벽’ 3월호에 수필 ‘지조론(志操論)’을 발표했다. 자유당의 대통령 선거 부정이 예견되던 때였다. “가장 읽을 만한 논문”이라는 평가였다.

“권두 논문인 조지훈 시인의 ‘지조론’은 이달 각 지(誌)의 논문 중 가장 읽을거리가 될 수 있는 백미편이어서 그 박력 있는 서술과 통쾌무비한 필주(筆誅)는 독자로 하여금 유음삼두(溜飮三斗)의 상쾌한 기분을 가져오게 한다.”(1960년 3월 12일 자 석간 4면)

1960년 3월 12일자 4면.

혜화전문(동국대 전신)을 졸업하고 서울여의대·동국대에서 강의했다. 27세 때인 194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 대학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로 시작하는 고려대 교가를 작사하고,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 등의 내용을 담은 ‘호상(虎像) 비문’을 썼다. 현재 사용 중인 고려대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 가사는 호상 비문 문구를 차용했다.

1960년 4·19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학생들의 4·18 시위 및 피습을 보고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시를 교내 신문에 발표했다.

1962년 6월 1일자 2면.

5·16 후에는 한때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 “권모술수는 버리고 공부하며 정치하라”며 “새 정신, 새 공약, 새 꿈으로 잘해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주문했다.

“불가피의 자위 수단으로 또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의 계기로 이번 혁명을 지지한 이상 새 정신에의 각오가 첫째 문제요, 어중이 떠중이 날뛰던 난장판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보다 공부나 좀 해가며 할 일이요, 반공 운동도 완미(頑迷)한 낡은 형식만으로 떠드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좀 더 크고 뚜렷한 이념과 광범(廣範)한 전선의 결성이 필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꿈을 전하는 까닭이다.”(1962년 6월 1일 자 2면)

권력의 남용에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학생 데모의 비애국성, 언론의 무책임, 지식인의 옹졸을 격렬하게 비난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칼럼을 써 비판했다.

“학생과 언론과 지식인은 그래도 다른 국민 여론의 정수요, 우리의 국운을 기대할 곳이 이 세 분야 밖에 없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일언(一言)으로 삼면(三面)을 공격하는 용기는 일신(一身)으로 국민 전체에 맞서려는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학생과 언론과 지식인들의 비판은 오히려 위정 책임자의 반성의 자료가 될지언정 비애국, 무책임, 옹졸이라는 일언으로 타매할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965년 5월 5일 자 1면)

1965년 5월 5일자 1면.

정권은 조지훈을 ‘정치 교수’로 분류했다. 1965년 9월 문교부는 조지훈을 비롯해 양주동·김윤경·서석순 교수 등 21명을 ‘징계 대상’으로 꼽았다. 조지훈은 이 조치에 강하게 비판했다.

“‘정치 교수’란 어불성설이다. 정부가 함부로 붙인 명칭일 뿐, 학원 내에 ‘정치 교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 경우 데모를 선동했다고 덮어씌웠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과격한 데모를 염려해 왔으며, 정당과의 관계도 전혀 없다. 또 법에 걸릴 짓을 한 일도 없다. 신문과 잡지에 쓴 글은 개인 자격으로 나의 주장을 개진한 것으로, 이를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 교수라는 명목으로 마음에 안 드는 교수를 몰아내는 것은 권력으로 교육을 못 하게 하고 진리를 찾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학교에 대해 교수 축출을 요구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다.”(1965년 9월 9일 자 3면)

1965년 9월 9일자 3면.

조지훈은 기고가 실린 다음 날 기관원이라고 밝힌 청년에게 자택에서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서울대 법과대학 양호민 교수와 함께였다. 정부는 조지훈이 징계 대상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6월 26일 재경 교수단 선언대회에 서명했고 7월 9일 재경 문인 한일 협정 반대 성명서에 서명했으며 그 밖에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하여 정부를 비방하는 논설을 씀으로써 학생 데모를 선동했음.”(1965년 9월 12일 자 1면)

조지훈은 이후에도 신문 기고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1967년 8·15 해방 22돌을 맞아 ‘마음의 장벽을 헐자’라는 제목으로 강경한 내용의 시론을 썼다.

“스물두 번째 8·15를 맞는다. 암흑과 절망과 질식에서 소생한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 있건만, 지순(至純)한 감루(感淚)에 젖었던 그날의 그 마음-함께 뉘우치고 서로 믿고 맹세하던 그날의 그 손길은 스물두 해 동안에 아주 사라지고 그 대신에 증오와 불신과 살육이 이 민족의 마음속을 휩쓸고 있다. (…) 당면의 적 공산당을 패퇴시킨 데 자족하여 민족 전선 내부 분열은 자유당 정권 이래 정권의 장기 장악과 탈취를 위한 불법으로 갖은 모해와 음험으로 같은 반공 전선의 동지를 제거하고 몰락시키고 살육하는 것으로 시종해왔다.”(1967년 8월 15일 자 1면)

1967년 8월 15일자 1면.

학자로서 활동도 소홀하지 않았다. 조지훈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한국문화사 대계’ 편찬 등 한국학 연구·발전에 힘쓰는 한편 ‘연려실기술’ 국역·윤문에 참여했다. 장지연 묘비, 이육사 시비 건립도 주도했다.

시작 활동도 이어갔다. 사상계는 1968년 1월호 특집으로 ‘청록 제2소시집’을 실었다. ‘청록집’ 이후 박목월·박두진·조지훈 청록파 세 시인의 시를 소개했다. 조지훈은 역사 의식을 나타내며 청록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지훈(芝薰)은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 시집에서 그동안의 정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세 사람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역사의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대사회적 대정치적 관심을 시로써 노래하였다. 또한 ‘청록집’ 이후 청록파적 경향에서 애써 탈피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보이고도 있어, 그러한 시가 이번에 발표된 것 중에서도 1949년 작으로 되어있는 ‘화체개현’ ‘절정’ 같은 작품일 것이다.”(1968년 2월 11일자 5면)

별세 소식은 갑자기 들려왔다. 1968년 5월 17일 오전 6시 기관지 확장 및 폐기종으로 별세했다. 부음 기사 제목은 ‘고고한 자세의 시인 조지훈’이었다.

1968년 5월 19일자 5면.

“시인 조지훈씨의 별세는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갑자기 덜미를 잡힌 것 같은 놀라움을 주었다. 약 1년 전부터 신병이 있었다는 얘기는 전해졌지만 그의 항상 높은 곳을 바라보는 듯한 곧은 자세와 정신의 장자다운 의젓한 풍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48세라는 그의 나이가 아직 그는 세상을 떠날 때가 못 되었다는 일반적인 통념 같은 것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었다.”(1968년 5월 19일 자 5면)

조선일보 미니 칼럼 만물상은 “한 시인의 죽음은 때로 한 시대의 죽음을 의미하게 될 때가 많다. 시인 조지훈씨의 죽음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시대의 조종 소리를 듣는다. 말하자면 시의 시대, 관조의 시대, 청록으로 상징되었던 자연의 그 시대가 우리들 곁을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1968년 5월 19일 자 1면)라고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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