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못 가눈다'고 평생 시설에 살아야 하나요... 장애인 배유화의 '독립일기' [최주연의 스포 주의]

최주연 2026. 5. 1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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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나오자 10cm 성장, 몸도 취향도 불쑥 컸다
활동지원사, 사회복지사... 촘촘한 지역 복지체계가 유화씨의 '새 식구'
부족한 자립 지원 주택,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은 여전히 탈시설 문턱
편집자주
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어쩌면 스포가 될지도 모를 결정적 이미지를 말머리 삼아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무슨 사연일지 추측하면서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비하인드가 펼쳐집니다.
탈시설 장애인 배유화씨가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에서 본인 방문 앞에 붙어있는 티니핑 스티커, 캐리커쳐 앞으로 활짝 웃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의 거실에서 배유화씨가 티니핑이 놓여있는 본인 방을 바라보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에서 배유화씨가 학교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여시야~ 과수원 집 아들이랑 결혼해야겠다."

활동지원사 우동주씨가 작게 자른 과일을 유화씨의 입에 쏙 넣어주며 농담을 던진다. 그 말을 들은 배유화(21)씨가 반달눈을 하고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린다. 뇌병변 장애와 지적 장애가 있는 배씨는 자립 3년 차 탈시설 장애인이다. 밥을 먹는 것도, 이를 닦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활동지원사들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다.

누군가는 이런 배씨를 보고 "거주시설에서 24시간 케어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8년 동안 시설에서 살았던 그도 과거엔 그렇게 믿었다. 공고하던 세계에 금이 간 건 '학교에 가면 내 또래의 친구가 있다'는 방문 순회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부터였다. 배씨는 지역 사회복지사들이 ‘자립 욕구 조사’를 왔을 때 느리지만 명확하게 "나가고 싶다"고 표현했고, 19세가 되자마자 시설 담벼락을 넘었다.

2018년 자립 전 한 거주시설에서 당시 14살이던 배유화씨가 시설 바닥에 누워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2018년 당 배씨가 거주시설에 살 당시의 모습(왼쪽 사진)과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의 본인 방에서 배유화씨가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을 이어붙였다. 배씨는 시설 퇴소 직후에 비해 10cm 자랐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배유화씨가 부산에 위치한 재활병원 앞에서 장애인 콜택시 '두리발'에서 내리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독립 후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배씨의 몸이다. 시설을 나온 직후와 비교했을 때 그의 키는 10cm나 자랐고, 베테랑 활동지원사가 번쩍 들면 종이인형처럼 달려 올라가던 몸도 어느덧 묵직해졌다. 중증 척추측만으로 인해 몸이 활처럼 휘던 배씨는 체형에 맞는 전동휠체어와 보조기기 덕에 보다 오래 휠체어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됐다.

정해진 시간에 식판에다 주는 음식만 먹어야 했던 시설을 벗어나니 먹거리에 대한 취향도 생겼다. 피자는 고구마 피자를 좋아하고 야식으론 과일을 먹는다. 늦은 밤 출출한 날이면 배씨는 특유의 미소를 띠며 "바.나.나" 하고 활동지원사를 조른다.

시설 시간표가 없어진 배씨의 24시간은 배씨가 직접 선택한 문화생활과 사교활동으로 채워졌다. 자립 후 지역에 있는 특수학교에 입학해 늦깎이 학생이 된 배씨는 얼마 전엔 같은 학교 반 친구 ‘지민’이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티니핑’ 뮤지컬을 보러 갔다. 반 친구 4명을 집에 초대해 피자 파티도 열었을 때 배씨는 자랑스레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어때?"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에서 배유화씨가 본인의취향대로 꾸민 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에서 배유화씨가 탈시설 지원 사회복지사와 활동지원사와 피자를 먹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의 한 자립지원주택에서 배유화씨의 자립왕 상패가 전시돼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배씨를 담당하는 장원혁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회복지사는 “자립 초기만 해도 낯가리고 말수도 없었으나 이제는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먼저 인사할 만큼 성격적으로도 밝아졌고 스스로 필요한 사항도 표현할 수 있게 됐다"라며 “활동지원사와 사회복지사, 주거지원 체계가 결합된 지역사회 돌봄망이 작동한다면 중증 장애인도 충분히 자기 집에서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장애인권리보장법'은 탈시설과 지역사회 공존을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로 명시했다. 기존 법령에 담겼던 '장애 극복'이나 '보호' 개념을 삭제하는 대신,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이웃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국가와 지자체의 지원 의무를 명문화했다. 장애인을 관리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세우며 국가의 책임을 한층 강조한 것이다.

7일 배유화씨가 부산에 위치한 재활병원 앞에서 장애인 콜택시 '두리발'에서 내리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 혜남학교에서 배씨가 학교 교실에 도착해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 파크사이드재활병원에서 탈시설 장애인 배유화씨가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그러나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탈시설을 희망하는 중증장애인들의 수에 비해 자립지원주택과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22세에 시설에서 나온 또 다른 자립 장애인 최유리(33)씨는 자립을 희망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최씨는 "임대주택 당첨은 거의 로또에 당첨되길 바라는 수준"이라며 "중증장애인 자립에 필수적인 활동지원시간 산정도 현재 제도상 너무 보수적이다"라고 꼬집었다.

현장의 활동가들은 성공적인 장애인의 지역사회 안착을 위해선 예산 확충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탈시설 NGO 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 활동가 미소는 "장애인 자립지원시범사업 예산은 전체 장애인 예산의 0.13%에 불과하다"라며 "시설 유지 중심의 국가 예산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 활동지원 24시간 보장, 충분한 지원주택 확대, 주거유지서비스, 동료지원, 의료·돌봄·소득지원까지 연결되는 지역사회 기반 지원체계로 전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탈시설 장애인 최유리씨가 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로활동지원사에게 서류를 전달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7일 부산 혜남학교로 배유화씨가 활동지원사 우동주씨와 등교하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7일 부산 혜남학교 앞에서 배유화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산=최주연 기자

최주연 기자 juic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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