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재현된 ‘여고생 묻지마 살인’…언제까지 이런 비극 방치할 건가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20대 남성 범인의 스토킹·성폭행 징후 외면한 공권력…되풀이되는 참극
(시사저널=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광주광역시의 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A양(17)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친구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던 착한 소녀였다. 집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주던 속 깊은 딸이었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에게는 다정하고 든든한 누나였다. A양의 꿈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응급구조사였다. 구급대원이 3명이나 있던 외가 식구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대학의 관련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하며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5월4일, A양은 화창한 날씨의 유혹을 뿌리치고 책가방을 멘 채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A양은 책과 노트, 필기구를 챙긴 후 카페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0시10분쯤 A양은 광산구 월계동의 한적한 거리에 이르렀다. 공사 현장과 아파트 단지 사이를 잇는 남부대학교 인근 보행로는 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때였다. 어둠 속에 있던 승용차 안에서 한 남자가 A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의 품 안에는 날 선 칼 두 자루가 숨겨져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해 만만한 범행 상대 골라
그는 차량으로 A양을 앞질러 가더니 밖으로 나와 길목에서 기다렸다. A양이 다가오자 품에서 칼을 꺼내 포장지를 벗겨내고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목 부위를 찔린 A양은 치명상을 입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고통 속에서도 "살려 달라"고 소리치며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의 가녀린 비명은 길 건너편에서 귀가하며 친구와 통화 중이던 B군(17)에게 전해졌다.
급박한 상황을 포착한 B군은 왕복 6차로 도로를 가로질러 현장으로 뛰어갔다. B군의 눈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A양과 흉기를 든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B군이 A양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막아서자 남자의 칼끝은 B군에게 집중됐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막았으나 손등이 크게 찢어졌고, 이어진 공격에 목 부위까지 찔렸다. 의식이 흐려질 만큼 크게 다치자 B군은 사력을 다해 괴한을 밀어내고 현장을 벗어났다. 그런 다음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남자는 B군을 뒤쫓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119와 경찰이 출동해 두 사람을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A양은 끝내 숨지고, B군만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 분석을 통해 장윤기(24)를 용의자로 특정하고, 사건 발생 11시간 만인 오전 11시24분쯤 그를 주거지인 원룸촌 인근에서 붙잡았다. 장씨는 다시 밖으로 나오기 위해 전자담배를 충전하고 택시를 부르던 참이었다. 그의 방에서는 범행 당시 사용하지 않은 나머지 칼 한 자루가 포장된 채 놓여 있었으며, 범행 당시 신었던 피 묻은 운동화가 발견됐다. 드러난 장씨의 정체는 놀라웠다. 그는 범죄 전과는 없었지만 이미 우리 사회 안전망 곳곳에 위험 신호를 보내던 인물이었다. 범행 이틀 전인 5월3일에는 아르바이트 동료였던 20대 베트남 국적 여성을 스토킹한 혐의로 경찰에 신고된 기록이 있었다.
자신을 피해 이삿짐을 싸는 이 여성을 찾아가 "광주를 떠나지 말라"며 폭력을 휘둘렀고, 사건 하루 전에는 해당 여성의 주거지에 무단 침입해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장까지 접수돼 있었다.
경찰은 스토킹 신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지만 장씨를 강력하게 격리하지 않았다. 그사이 그는 주방용 칼 두 자루를 구입했다. 장씨는 원래 자신을 신고한 베트남 여성을 노렸지만,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고 다른 지역으로 몸을 피하자 보복 대상을 잃었다.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고, 대신 화풀이 대상으로 만만한 상대를 골랐다. 장씨는 경찰에서 "사는 게 재미없어 자살하려고 했고, 죽기 전 누구라도 데려가려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불안한 정신 상태에서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중 피해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죽는 순간까지 눈을 감지 못한 피해자
하지만 범행 전후 그의 행적은 전혀 달랐다. 흉기를 미리 준비했고, 지리에 익숙한 장소에 자신의 차를 세우고 범행 대상을 찾다가 혼자 귀가하던 여학생을 타깃으로 삼았다. 자신을 거부한 여성에게 품은 적대감을 일면식도 없는 어린 여학생에게 투사한 것이다.
범행 직후 장씨가 보인 행동도 우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현장을 벗어난 후 약 1km에 있는 공터와 배수로에 각각 차량과 흉기 한 자루를 버렸다. 이어 그가 찾아간 곳은 무인 빨래방이었다. 이곳에서 피 묻은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그사이 전자담배를 충전하며 여유를 부렸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휴대전화를 끄고 도보로 이동하다 택시를 탄 후에는 현금으로 결제했다. 또 휴대전화 2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도주 과정에서 공기계로 바꾸고, 범행 당시 사용한 휴대전화는 하천에 유기했다. 자신의 거주지가 아닌 비어 있던 원룸에 일정 시간 머물렀다. 스스로 죽으려고 고민했다던 진술과는 정반대로 어떻게든 살아남아 법망을 피하려 한 흔적이 역력했다. 장씨는 평소 정신질환 병력은 없었고, 범행 당시 음주 상태도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이코패스 진단 평가(PCL-R) 결과 사이코패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장씨는 A양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그의 꿈과 미래까지 짓밟았다. 응급구조사가 되어 위급한 생명을 구하고 싶어 했던 소녀는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향해 "119에 신고해 주세요"라고 외쳤다. 이게 생전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눈을 감지 못했고, 부모가 겨우 감겨줬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하얀 천을 덮은 시신을 보고 혼절했던 남동생은 발인식에서 누나의 영정을 들었다. A양은 생전에 다니던 학교에 마지막으로 등교한 후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영면에 들어갔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 일각의 시선은 두 얼굴을 하고 있었다. A양의 안타까운 죽음에 분노하고 추모하며 그가 스러져간 현장에 국화꽃을 놓아둔 시민이 있는가 하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장씨의 신상이 공개되자 일부 누리꾼은 피의자를 치켜세우거나 동정하며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다" "잘생겼는데 왜 그랬냐"는 식의 외모 평가를 늘어놓았다.
범죄의 본질인 잔혹함보다 겉모습에 집중하는 이른바 '하이브리스토필리아'(범죄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현상)는 피해자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2차 가해를 했다. 범죄자에 열광하는 '범죄자 미화 현상'이 연쇄살인범 김소영 사건에 이어 불과 석 달여 만에 재현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생존 피해자인 B군을 향한 화살이었다. 그가 흉기에 찔려 의식이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몸을 피한 것을 두고 "여고생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식의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목과 손등을 깊게 찔려 생명이 위태로웠던 소년의 용기는 일부 비뚤어진 시선에 의해 왜곡 당했다. B군은 퇴원 후에도 낯선 사람만 보면 몸이 굳는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범인의 칼날보다 차가운 온라인상의 조롱이었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또다시 드러냈다. 스토킹 신고와 성폭행 고소가 잇따랐던 피의자가 도심 한복판에서 흉기를 들고 이틀간 배회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공권력을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다.
묻지마 범죄는 예측할 수 없기에 막을 수 없다는 말도 이제 변명이 될 수 없다. 피해자를 단순히 '운이 나빠 당한 묻지마 범죄 희생자'로만 치부해서도 안 된다. 이는 사회적 고립과 혐오 정서가 뒤섞여 만들어진 '구조적 살인'이다. 고립된 개인이 증오를 키우는 동안 국가가 개입하지 못한다면, 평범한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걸까. 이제는 '대책 검토'가 아니라 실질적인 격리와 감시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스토킹이나 약자 대상 범죄 징후가 포착되는 즉시 선제적으로 격리하는 법적 강제성을 부여해야 한다. 또한 고립된 개인의 분노가 사회를 향한 증오로 번지기 전에 이를 발견할 사회적 감시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재작년 9월 '순천 여고생 사건' 아직 생생한데
현재의 치안 시스템은 범행이 일어난 후에 움직이는 구조다. 수사기관은 인권 침해 논란을 의식해 잠정 조치나 구속영장 신청에 소극적이며, 지자체와 경찰 간 정보 공유는 칸막이 행정에 가로막혀 있다. 전문가들은 장씨처럼 자살과 살해를 동시에 암시하는 고위험군을 국가가 책임지고 관리할 수 있는 '사법입원제'나 '강력 범죄 예방 구금' 등이 시급하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위험 징후가 포착된 인물에 대한 '선제적 격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한, 이런 비극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이상행동 감시 CCTV 도입이나 장씨처럼 여러 차례 위험 신호를 보내는 이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위험인물 통합관리 시스템' 구축도 검토해야 한다. 지금처럼 경찰, 법원, 의료기관이 제각각 정보를 쥐고 있는 사이에 언제 어디서 시한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범죄자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죽은 소녀의 꿈이 되살아나거나 교실의 빈자리에 다시 앉힐 수 없다. 책상 위에 놓인 국화 대신 죽은 친구의 웃음소리를 다시는 들려줄 수 없다. 아무리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해도 또 어느 고등학교의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는 현실이다. 불과 1년7개월 전에 광주 인근 순천에서도 새벽에 귀가하던 17세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는 30대 남성에게 흉기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도 정치권에서는 "심각한 문제"라며 대책 마련을 떠들었고, 경찰은 박대성의 신상을 공개하고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공염불에 불과했다.
특히 지난 3월에는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에 시달리던 여성이 스마트워치까지 지급받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살릴 수 있는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공권력의 무사안일이었다. 이때도 경찰은 김훈의 신상을 공개하고, 강력한 후속 대책 마련을 약속했지만 결국 두 달 만에 스토킹 피해자 대신 여고생이 희생됐다. 이대로 두면 몇 개월 후, 또는 일 년 후에 누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뉴스에 오르내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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