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카페에서 죽음 이야기를 나누다 [.txt]

한겨레 2026. 5. 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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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에이징북
“내게 왜 이런 일이?” 일리치의 절규
죽음을 감추는 거짓말은 지금도 계속
결국 ‘원하는 삶을 살았는가’가 중요
지금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오늘까지의 내 삶을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은 죽음과 상실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좋던 지난 4일 저녁, ‘카페 사담’ 모임이 열릴 서울 성북구의 한 한옥 카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묘했다. 모임 이름의 ‘사담’은 사적인 이야기이자 죽음에 관한 대화라는 뜻이다. 이 좋은 봄밤에 죽음 이야기라니.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1인 가구 연구소 스스로랩이 2011년 영국에서 시작된 데스 카페와 제휴하여 진행하는 ‘카페 사담’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삶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매달 4일 열리는 모임이다. 슬픔을 달래거나 상담받는 자리가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며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그날 나눈 이야기는 비공개이므로 여기 쓸 수는 없지만, 대화에 참여한 뒤 든 생각은 죽음의 얼굴도, 상실의 모양도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육십 가까이 살아오면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어봤는데도 여전히 내 경험이 비좁다는 점을 깨달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상실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듯했다. 울어도 되고 서로의 이야기를 판단 없이 경청하는 대화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의 감각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의 무게를 공유했다.

봄밤의 죽음 이야기는 꽤 괜찮았고,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과거의 생각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종종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떠벌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럽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마따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이 닥치면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과 외로움, 관계의 상실이 빠져 있다. 그렇게 죽음이 추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땐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의 동료와 가족도 그랬다.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빈자리를 두고 승진과 자리 이동을 떠올렸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보다 이를 목격하는 자신의 고통을 더 괴로워하고 사후 연금을 어떻게 더 챙길지 계산했다.

죽음이 남의 일 같기는 당사자인 이반 일리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논리학의 삼단논법을 떠올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이런 명백한 사실이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카이사르는 일반적 인간이니까. 이반 일리치 자신은 카이사르도 아니고 일반적 인간도 아니며,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가진 내가”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심리 묘사의 대가인 톨스토이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사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 고립과 회한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들을 던진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l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창비(2012)

오래전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땐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라는 주인공의 절규가 마음에 꽂혔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닥쳤을 때 누구나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혹시 내가 잘못 살아온 결과는 아닐까.

하지만 잘 살아온 삶의 보답으로 편안한 죽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이 그 벌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지도 않는다. 죽음은 가차 없고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조차 선택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다.

죽음에 이유가 없음을 인정하게 된 이반 일리치가 직면한 진짜 질문은 자기 삶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는가, 아니면 남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모양을 따라 살았을 뿐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죽음에 직면했을 때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래전 인생의 경로를 바꿀 때 이 책의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며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는 이반 일리치가 끔찍한 통증보다 더 힘들어했던 거짓이 눈에 들어왔다.

죽어가는 게 아니라 병이 들었을 뿐이고 치료만 잘한다면 좋아질 거라는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거짓말.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품위가 없는 일 정도로 격하”하는 거짓말.

죽음을 삶에서 분리해내 감추고 거짓말하는 것은 140년 전 이반 일리치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차이가 있다면 우리 시대는 말뿐인 거짓말이 아니라 거대한 의료 시스템을 동원해 죽음을 병원 안에 격리해 보이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즘 가장 흔한 방식의 죽음은 시설과 요양병원, 종합병원 중환자실, 처치실을 전전하는 도중에 맞는 죽음이다. 어쩌면 이반 일리치의 시대보다 더 큰 구조적 거짓으로 죽음을 감추고 있다.

죽음이 내가 일상을 꾸려가는 동네를 떠나 병원의 일이 되면서 점점 더 죽음과 상실, 슬픔은 기피의 대상이 되어간다. 거짓말을 멈추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되돌리려면 개인의 범위를 뛰어넘는 커다란 변화가 필요할 테지만, 우선 우리가 죽음을 터부시하지 않고 드러내 이야기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제한하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하는 시간을 일부러 갖는다면 어떨까.

‘카페 사담’에서 죽음을 삶의 자리로 초대하는 대화를 나눈 뒤 집에 돌아가며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하나였다. 지금 당장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오늘까지의 내 삶을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은 죽음과 상실이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김희경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김희경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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