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은 1세대 신탁은 3세대"…세법 못 따라가는 신탁시장

박미라 기자 2026. 5. 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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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커지는 신탁 수요…세제개편론 확산
"사후 상속보다 장기 자산관리 중요성 커져"
구글 제미나이(Gemini) 생성 이미지. /제공=머니투데이방송(MTN)


"신탁이 좋은 제도라고는 하지만 실제 상담에선 고객들이 세제상 어떤 혜택이 있느냐고 가장 많이 묻습니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유언대용신탁과 치매신탁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세법이 신탁의 새로운 기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서 제도 개선 필요성도 커지는 모습이다. 단순 상속을 넘어 '세대 간 자산관리' 수단으로 진화한 신탁을 현행 세법이 여전히 '한 번 물려주고 끝나는 상속'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KB국민·하나·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5조1836억원으로 집계됐다. 2024년 3조원 수준이던 시장은 최근 5조원을 돌파하며 빠르게 커지고 있다. 고령화와 치매 대비 수요가 맞물리면서 치매 고령층 자산인 이른바 '치매머니' 규모도 현재 17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이 생전에 자산 관리와 사후 상속 방식을 미리 설계해두는 신탁 상품이며, 치매신탁은 고령자의 판단 능력이 저하되기 전 자산 관리를 맡겨 향후 치매 등에 대비하는 상품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시장 성장 속도에 비해 세법 정비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신탁의 핵심 기능인 '연속 수익자' 개념을 현행 상속세 체계가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연속 수익자란 자녀·손주 등 세대별로 자산을 나눠 물려주는 방식을 뜻한다.

유언은 일반적으로 특정 상속인에게 재산을 한 번 넘기면 효력이 종료된다. 반면 신탁은 자산을 신탁회사 등에 맡긴 뒤 "자녀에게는 일정 기간 수익만 지급하고, 이후 손주 세대에 최종 소유권을 넘긴다"는 식으로 세대별 자산 이전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실제로 현장에선 부모 세대 사망 이후 자녀에게는 부동산 임대수익만 지급하고, 자녀 사망 후 손주 세대에 최종 자산을 이전하는 방식도 활용되고 있다. 자산 탕진 가능성이 있는 상속인에게는 원금을 제한하고 생활비 형태로만 지급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 시중은행 신탁 담당자는 "유언은 1세대에서 끝나는 개념이지만 신탁은 2~3세대까지 자산 이전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라며 "고객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산을 장기간 관리할 수 있다는 게 신탁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현행 세법이 이런 방식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자녀·손주 등에게 순차적으로 자산이 이전되는 방식인데도 세법상으로는 전체 재산을 한 번에 상속받은 것으로 간주해 과세하는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다.

가업승계 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현행 가업상속공제는 최대주주가 오랜 기간 지분을 보유했는지를 중요하게 보는데, 신탁을 활용하면 주식 명의가 신탁회사로 넘어가면서 기존 보유 기간을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불확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는 신탁 활용을 망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시중은행 신탁 담당자는 "가업상속공제를 받으려면 장기간 지분 보유 요건이 중요한데 신탁을 활용하면 명의가 바뀌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는 활용을 주저하는 경우가 있다"며 "정부가 승계를 지원하겠다고 하면서도 실무에서는 제도 충돌이 발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에 신탁 관련 세법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논의 중인 '유산취득세'가 도입될 경우 신탁 활용도 더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지금은 고인이 남긴 전체 재산을 기준으로 상속세를 매기지만, 유산취득세는 상속인이 실제 받은 금액만큼만 세금을 내는 방식이다. 업계에서는 이렇게 되면 자녀·손주 등에게 자산을 나눠 물려주는 신탁 활용이 한층 쉬워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은행에서 국내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선보인 배정식 법무법인 화우 수석전문위원은 "과거에는 신탁이 일부 고액자산가 중심 제도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고령층 자산 보호나 치매공공신탁 등 사회적 기능이 확대되고 있다"며 "초고령사회에서는 사후 상속보다 장기간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기능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정식 위원은 그러면서 "신탁시장 자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세법은 여전히 단순 상속 중심 체계에 머물러 있다"며 "유산취득세나 신탁 관련 세제 논의를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박미라 머니투데이방송 MTN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