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보다 큰 공원을 기부한 농부의 아들, 그가 남긴 질문은?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2026. 5. 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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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세계사] 찰스 베니언, 영국 레스터주의 조용한 혁명가

돈이 많으면 다 쓸 줄 알아야 한다는데, 정말 그렇게 산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는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영국에는 "진짜 부자는 죽을 때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는 문화가 있다는 말도 있는데, 물론 그게 모든 부자에게 해당하진 않는다. 대부분은 가져갈 수 있는 데까지 가져가려다 자식들 싸움만 남기고 간다.

그런데 찰스 베니언(Charles Bennion, 1857~1929)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그는 죽기 1년 전, 자기 돈으로 850에이커(약 344만 제곱미터, 여의도 면적의 약 1.2배)짜리 공원을 통째로 사서 영국 레스터주 주민들에게 그냥 줬다. 그것도 "영원히 자연 상태로 보존하여 레스터주 사람들이 무료로 조용히 즐길 수 있도록"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유언비어도 아니고, 세금감면을 위한 꼼수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냥 줬다.

현대 한국 재계 인사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그래서 주식은 얼마나 받았습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농부 아들, 기관차를 배우다

베니언은 1857년 영국 슈롭셔 주 애덜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를 키울 때, 그는 소보다 기계에 눈이 갔다. 당시는 증기기관과 기계화가 농업과 교통과 공업을 동시에 뒤흔들던 시대였다.

그는 청년시절 체셔주 크루(Crewe)의 철도공장에서 견습 기술자로 일을 시작했다. 19세기 영국 철도공장이란, 그 시대 최첨단 기술의 집결지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 것과 비슷하다. 그는 거기서 배울 것을 다 배우고 나서,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녔다. 선박기관사로 일하면서 세상구경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배낭 하나 메고 유럽 배낭여행을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배를 타고 세계를 누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교육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구두제조 기계산업에 뛰어들었다. 1880년대에 레스터에 정착했는데, 당시 레스터는 노샘프턴(Northampton)과 함께 영국 구두·장화산업의 중심지였다. 그 시절 구두는 사치품이 아니라 산업재였고, 구두기계를 잘 만드는 회사는 곧 떼돈을 버는 회사였다.

1899년, 그는 마셜 피어슨과 손잡고 '피어슨 앤드 베니언 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나중에 미국의 '유나이티드 슈 머시너리 컴퍼니(United Shoe Machinery Company of America)'와 합쳐져 '영국 유나이티드 슈 머시너리(British United Shoe Machinery Co. Ltd)'가 됐다. 베니언은 이 회사의 전무이사로 1899년부터 1929년 세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일했다. 직원 수만 약 2,000명에 달했다.

농부의 아들이 2,000명을 먹여 살리는 회사의 수장이 된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개천에서 용 났다"인데, 베니언의 경우 용이 된 다음에 한 행동이 더 중요하다.

브래드게이트 공원, 귀족의 땅을 민중에게

레스터주 뉴타운 린퍼드 인근에 브래드게이트 공원이 있다. 이 땅의 내력이 예사롭지 않다. 13세기 초부터 중세 사냥터로 쓰였고, 1445년에 그레이 가문이 이 땅을 차지했다. 그레이 가문은 약 500년간 이곳을 소유했다. 이 공원 안에는 레이디 제인 그레이(1537~1554)의 어린 시절 집이자 출생지로 알려진 브래드게이트 저택의 폐허가 지금도 남아 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영국역사상 단 9일 동안 여왕 자리에 앉았다가 메리 1세(1516~1558)에게 밀려 열여섯 살에 단두대에서 처형된 비운의 인물이다.

역사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땅이었다.

그런데 1925년, 수백 년 이어온 그레이 가문이 이 땅을 팔려고 내놓았다. 당시 레스터 시는 이 땅을 공공용으로 구입하길 원했지만, 돈이 없었다. 공공기금 마련은 실패했고, 850에이커의 역사적 공원이 개인 개발업자의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찰스 베니언이다.
그는 사재를 털어 이 공원을 통째로 샀다. 그리고 그것을 신탁형태로 만들어 1928년 12월 29일, 공식적으로 레스터주에 증여했다. 단 한 가지 소망을 담아서: "영원히 자연 그대로 보존하여 레스터주 사람들의 조용한 즐거움을 위한 무료공간으로 남기기를."

베니언은 이 증여를 마친 지 불과 세 달도 안 돼, 1929년 3월 21일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치 마지막 숙제를 끝내고 조용히 눈을 감은 것처럼.

그가 남긴 유산 총액은 27만 5,051파운드였다.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지만, 그가 공원을 사는 데 쓴 돈은 그 이상이었다. 그 돈이 얼마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공원 안에 세워진 화강암 기념 동판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의 진정한 기념비는 그를 둘러싸고 있다(His true memorial lies around)."

따로 동상이 없다. 거창한 이름이 붙은 건물도 없다. 공원 그 자체가 기념비다. 찰스 베니언, 참 쿨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고, 한국을 들여다보자.

오늘 한국사회에서 재벌총수가 "내 돈으로 공원 샀으니 시민들 무료로 쓰세요"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 아마 다음 날 뉴스엔 이런 제목들이 달릴 것이다. '비자금세탁 의혹?', '상속세 회피 편법?', '세제혜택 노린 꼼수기부?' 물론 이런 의심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만큼 한국에서 기업인의 '사회 환원'은 언제나 조건과 의도가 붙어 있었다.

이름에 기업이름을 붙인 공원, 세금혜택을 노린 재단, 자녀교육을 위한 장학금, 이미지 세탁용 미술관. 이런 것들이 워낙 많았기에, 순수한 기부가 오히려 의심을 받는 기이한 사회가 됐다.

베니언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증여한 공원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브래드게이트 공원은 지금도 브래드게이트 공원이다. '베니언 공원'이 아니다. 그는 공원 운영이사회에 자기 가족을 넣지 않았다. 그는 기부 이후 세금감면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줬다.

한국사회에서 부의 사회 환원이 진정으로 가능하려면, 제도적 장치와 문화적 토양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기부하면 의심받고, 세금내면 '세금 도둑'이라 욕하는 사회에서 베니언 같은 사람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역으로, 그런 사람이 나왔을 때 사회가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 정신을 제도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브래드게이트 공원은 지금도 레스터주에서 가장 많은 시민이 찾는 공간이다. 무료다. 누구나 온다. 개가 뛰어다니고,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노인들이 느릿느릿 산책한다. 중세 사슴공원에서 시민의 쉼터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결단이 100년 뒤 수백만 명의 일상을 바꿔놓은 사례다.

한국에 지금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러나 그 결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제도로 뒷받침하고, 사회적 신뢰로 화답할 준비가 우리에게 돼 있는가? 이것이 진짜 질문이다.

그가 남긴 질문

찰스 베니언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행동은 몇 가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부(富)는 누구의 것인가? 베니언은 자기가 번 돈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레스터주의 땅에서, 레스터주 사람들과 함께 만든 회사에서, 레스터주 노동자들과 함께 일군 부였으니, 그것을 레스터주에 돌려주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성공한 지역에 보답한다는 개념, 한국재계에서는 얼마나 내면화돼 있을까?

둘째, 기부에는 이름이 필요한가? 이름 없는 기부가 더 오래 기억된다는 역설을 베니언은 보여줬다. "그의 진정한 기념비는 그를 둘러싸고 있다"는 문구는, 화려한 동상보다 훨씬 더 강하게 그를 기억하게 만든다.

셋째, 타이밍이 맞는가? 베니언은 증여직후 세상을 떠났다. 그가 10년 더 살았더라도 같은 결단을 내렸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죽기 전에, 손수 전달했다. 죽고 나서 유언으로 남기는 기부와, 살아서 직접 전달하는 기부는 그 무게가 다르다.

찰스 베니언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기술자가 됐고, 기술자에서 기업인이 됐고, 기업인에서 자기 시대가 요청한 방식으로 나름의 답을 내놓은 사람이다. 그 답이 850에이커의 공원이었다. 거창한 철학도 없었다. 선언문도 없었다. 그냥, 샀고, 줬고, 떠났다.

그리고 그 공원은 오늘도 거기 있다. 사슴이 풀을 뜯고, 아이들이 폐허가 된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저택 잔해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강이 흐른다.

민들레 한 줄기가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올라오듯, 어떤 선한 결단은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다.

▲찰스 베니언 ⓒ 필자 제공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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