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매끈매끈해”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 할 이유 [취재후]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아시나요? <죄와 벌> <악령>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렇게 네 권을 합쳐 '4대 장편'이라 부릅니다.
네 권을 합치면 일반 도서 기준으로 6천5백 쪽이 넘는 분량입니다. 일반인들은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엄두를 내기 힘들 정도로, 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오지만, 이 네 편의 장편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 전문가인 김정아 박사. 10년에 걸쳐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모두 완역한 주인공입니다.
도스토옙스키를 '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함께 해 온 10년. 이번에는 번역자로서의 이야기를 풀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하는 책을 냈습니다.
한 사람이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을 모두 완역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분이죠. 이런 일을 한 김정아 박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 박사는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미국으로 건너가 미 일리노이주립대학교 대학원(어배너-섐페인 캠퍼스)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패션업체 '스페이스 눌'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업체를 이끌며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번역했다고 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일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내가 사용하는 시간대가 다른 이들과 다를 뿐"이라며 웃었습니다.
"저는 일찍 집에 들어가요. 오후 4시 반~ 5시면 집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쉬고 요가하고 저녁 8시 반 정도면 자요. 그리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번역 작업을 하는 거니까, 실제로는 다른 분들이 이제 놀 때 저는 자고, 다른 분들이 주무실 때 저는 일어나서 노는 거죠."(김정아 번역가)
김정아 박사가 번역한 책은 일반 종이 표지 책으로도 나와 있지만, 한정판 고급 양장본으로도 출간했습니다.
도선생 작품세계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죄와 벌>은 초록색 표지로, <백치>는 하얀색 표지로 냈습니다. 또 4권을 모두 묶어서 한 권의 양장본으로 한정 출시하기도 했는데요, 번역가가 한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시도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김 박사는 네 권의 장편에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이 담겨있어서,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도 선생님의 4대 장편은 4대 복음서에 비할 만하다"고 했는데요, 실제로 복음서처럼 두꺼운 분량에 고급 도금으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이렇게 (값도 비싸고) 두꺼운 책을 읽겠느냐 싶을 수 있지만, 한정판에 대한 호응이 예상보다 커서 판매 목표치를 훌쩍 넘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도 고전 중의 고전 '도스토옙스키 한정판'을 소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의 고전을 읽어야 할 이유는 뭘까요? 무엇을 위해 이 엄청난 분량을 우리말로 옮기느라 10년의 새벽을 갈아 넣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 김 박사는 불쑥 '쇼펜하우어'를 꺼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자기계발서 삼아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 열풍'에 대한 우려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자신이 AI에 대체되지 않을까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데, 이 불안한 시대에 염세주의와 비관주의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이 매우 우려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염세주의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고전을 읽으며 '연민과 무한 긍정'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대문호'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 역시 찢어지게 가난했고, 뇌전증(뇌전증)을 앓으며 자식도 같은 병으로 잃기도 했고, 사형의 문턱까지 갔다가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등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 끝에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무한 긍정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단편적 생각이 아니라 '완결된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고전이고, 그런 고전의 정점에 도스토옙스키가 있다고 말합니다.
"AI 시대가 올수록 저는 인문학, 철학이 살아남을 시대가 된다고 봅니다. 스마트폰이 개발되고 나서 우리가 더 이상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게 된 것처럼, AI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이게 정말 무서운 거거든요. 고전을 읽고 생각하는 능력, 완결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우리를 진정한 호모 사피엔스로 남을 수 있게 해주는 거 아닐까 해요. 그래서 저는 고전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아 번역가)
하지만 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은 대체되고 있지 않나요? 특히나 번역이야말로 인공지능이 잘할 수 있는 일로 꼽는데, 사람이 번역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4대 장편을 번역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번역일기> 출간 소식에 이분을 만나보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AI가 하는 번역과 사람이 하는 번역은 어떻게 다른가요?"
"제 생각에 AI는 너무 매끈매끈해요. 너무 반질반질해요. 그런데 사람이 번역하게 되면 약간 울퉁불퉁한 것도 있고 망설임도 있고 멈춤도 있고 한숨도 있고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런 것들은 AI가 담아낼 수 없다고 봅니다."
"작가에 대한 사랑, 작가에 대한 이해, 작품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번역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도선생님은 소울메이트, 영혼의 단짝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번역을 할 때도 진짜 계속 대화하면서 번역을 했어요. 그래서 그 새벽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김정아 번역가)
너무 매끈해서 어울리지 않는 AI와 달리, 함께 망설이고 한숨을 쉬며, 때로 환호하며 옮긴 번역 작업. 그 작업 일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하루에 몇 시간씩 책상에 붙어 앉아 번역하다 허리도 아프고, 손목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온갖 괴로움을 겪는 번역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슬며시 웃음이 나오다가, 도선생의 세계로 함께 한발 들이게 되는 것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글이 술술 읽히는, 읽는 맛도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지, 전문가의 안내도 받을 수 있는데요, 특히 읽는 순서로는 <죄와 벌>을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네 권의 장편이 하나의 시리즈처럼 이어지는데, <악령>을 먼저 읽으면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조언입니다. <악령>보다는 <백치>를 앞서 읽어야 하는 것도 맞군요.
또 다른 번역가들의 작업과 비교했을 때, 본인의 번역본은 "가장 성실한 도스토옙스키 번역"이라고 자평했습니다.
올해는 김정아 박사의 번역으로 '도선생'의 세계에 입문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연관 기사] [새로 나온 책] “생각능력 위해 고전 읽어야” 도스토옙스키 번역 일기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557317
■ 제보하기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유튜브, 네이버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이수연 기자 (isuyon@kbs.co.kr)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 금지
- 삼성 파업 ‘긴급조정’ 하면 벌어질 일들
- 스파이로 써먹고 버렸다…검찰은 달라질까?
- 서울 정원오 43%·오세훈 32%…‘강남 3구’에선 접전 [여론조사]① D-19
- 부산 전재수 42%·박형준 33%…26%는 “당 보고 뽑겠다” [여론조사]② D-19
- 평택을 김용남·유의동·조국 오차범위 접전…하남갑 이광재 42%·이용 31% [여론조사]③
- “대기자 있으니 반납하세요”…‘스마트워치’ 연장도 어렵다
- 악성 민원에 멍드는 교심…‘대응팀’ 있으나마나
- 시진핑 관저 오찬 회동…‘중난하이’는 어떤 곳?
- K팝 콘서트 ‘티케팅 전쟁’ 속 대리 티케팅 사기 피해 눈덩이
- 때이른 무더위에 때아닌 피서 행렬…이 시각 청계천